‘정통성위에 세워진 常外之常’ 중진화가 박지오 화백 화실방문기 작품리뷰2.
박지오 회백은 충무로 사진전문 브레송 갤러리(관장 김남진)바로 뒤편에 널따란 화실을 마련하여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박 화백의 화실을 방문하게 된 것은 그에게 선물 받은 ‘한국대표 중진화가 선집 8’ 작품집을 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식당 개 3년이면 라면정도는 끓인다고 벌써 7년이나 기자로서 온갖 전시회와 많은 작가들을 만나 보았으니 아주 맹물은 아닐 것이다.
박 화백의 작품은 필자의 유년기속에 각인된 회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더듬게 했다고 하면 맞을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랫동안 함께 한 친구 같은 느낌이 그의 그림에서 우러나왔다.
“정통을 바탕으로 한 새로움”
그가 강조한 지론이 아니더래도 그의 그림은 고향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함과 낯이 익은 화풍이다. 필자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시나 잘 팔리는 화가 군에 속해 있는 것을 보면....
또 하난 그의 작품들에 더욱 존경심이 우러나는 것은 마치 사진을 대하는 듯 한 순간포착이다. 우리네 주변의 일상적인 평범이 그의 모티브다. 그것은 오늘 우리네의 삶의 한순간의 고착이며 시대의 초상이다. 마치 다큐멘터리 사진 한편을 다 본 것 같은 감회는 가까움 속에서 오늘 이 시대를 대변한 그의 관조 덕분일 것이다.
* 중앙대 사진과 교수인 이경률 박사의 글을 받은 것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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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욕구를 위한 여명의 신호
화가 박지오의 작품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소고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어떤 현상의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 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으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껍질에 본질적인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끝없이 껍질을 벗기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행위(acte)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물을 매체(media)라고 하고 형상으로 출현한 껍질을 흔히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껍질에 새겨진 형상은 언제나 어떤 사태의 진상이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암시하는 자국 혹은 지시(index)이다. 왜냐하면 본질은 끝없이 껍질만 드러내는 양파처럼 언제나 부재의 신호로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눈에 곧 해가 뜰 것 같은 여명(黎明)의 신호로서 창작 행위의 가장 시원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예술의 분명한 실체로서 본질의 해는 영원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양파의 껍질과 알맹이로 비유되는 예술 작품의 올바른 이해는 결과물로 나타난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을 출현하게 한 최초 어떤 원인적인 것에 있게 된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정신적 메커니즘에서 모든 행위에는 그 원인적인 것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나 예술에서 드러나는 정신적 생산물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충동으로부터 야기된다. 바로 이 충동의 세계는 우리가 현악기의 현(絃)을 울릴 때 각자에게 전달되는 소리의 공명(共鳴)처럼 오로지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주관적인 “내적 의미의 연관(聯關)” 말하자면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공(空)의 세계를 암시한다. 사실상 작가들이 실행하는 예술 행위를 잘 관찰해보면 작가는 처음부터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충동(intuition)과 알 수 없는 욕구(desir)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비주얼 리터러시(Iiteracy) 개념을 설명하는 실제적인 배경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작품의 테마라고 언급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로부터 진화된 문화적 코드를 말한다.
화가 박지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감각의 논리를 주파하고 있다. 작품은 장면의 지리적인 장소와 그것이 암시하는 상황적인 인상(impression)이 겹쳐진 일종의 표현적인 대위법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풍경들은 엄밀히 말해 구체적인 장소의 확인이나 조형적인 미적 효과를 넘어 과거 자신의 경험적인 기억과 인상으로부터 다시 재구성된 현실로 이해된다. 이럴 경우 작가가 실행한 그림의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경험적인 인상을 재구성하는 탁월한 재현도구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재구성된 장면은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 출현과 부재 그리고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음률로부터 환기되는 어떤 미묘한 느낌과 같이 선과 면, 색과 형태, 자국과 터치, 시간과 공간이 만드는 미묘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들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hic et nunc)을 호출한다는 관점에서 결코 모호한 장면들이 아니다. 예컨대 거리 풍경, 사랑하는 사람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 집, 가로수와 버스, 우산을 들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 분주한 시장 상인들, 육교를 내려오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 등의 이미지들은 첫눈에 장면의 신빙성과 장소의 확인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보는 이가 그 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실제 효과는 오늘날 화가로서 역사적 사건을 사진의 실제로 구성하는 제프 웰(Jeff Wall)의 그림-사진(Tableau-Photo)이나 그림의 형태로 대중 매체에 의해 왜곡된 독일 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의 사진적 그림(Photobilder)에서 나타난다.
작가의 풍경들은 응시자에게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장면들 - 예컨대 시장 풍경, 거리 풍경, 군상들, 산동네 풍경, 비탈진 골목길, 번두리 한적한 도로, 버스 정류소, 화가 자신이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동네 풍경- 등과 같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단면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장면들은 엄밀히 말해 현실의 단순한
묘사나 재현이 아니라 과거 자신이 경험한 기억의 인상으로부터 다시 재구성된 현실로 이해된다. 이때 이미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행위 그 자체와 시각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 행위에 앞서 일어난 어떤 비밀스런 생성(genese), 즉 자신도 분명히 인지할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서 대상과의 강렬한 교감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원인을 존재론적으로 스팀뭉(Stimmung)이라고 한다. 이것은 유일하게 느낌의 어조 혹은 음색 (tonalite)으로 번역되는데, 특별히 작가들이 실행하는 예술적 행위에 있어 가장 원천적인 무엇이 된다. 또한 우리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물질로 전이(轉移)된 것을 말한다. 특히 “화가는 그때 거의 영감(신의 계시)으로부터 행동한다. 형이상학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그림은 화가가 화폭을 이젤에 놓기도 전에 그리고 색의 연금술이 정리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다. ( ... ) 그림은 스팀뭉의 찰나(instant)를 가지자마자, 작가의 기억소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스팀뭉의 발견은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생성을 재생하는 의미를 가진다.”
스팀뭉의 물질적인 재생은 작품의 진행과정 특히 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그림의 내부적 주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잉태되고, 흔히 자신의 순수기억이나 또 다른 환상의 욕구로서 레미니센스는 이러한 주제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화가가 가장 먼저 활용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폴 클레 (Paul Klee)의 “음악의 그래픽적 전이“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마들렌 과자가 유발하는 무의식적 기억은 사실상 작가의 기억소생을 통한 상황적인 음색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풍경은 더 이상 있음직하지 않은 기억의 재구성 즉 ”스팀뭉과 영혼의 결정적 찰나(instant accorde)"로서 스티뭉겐 (Stimmungen)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정적 찰나의 포착은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찰나는 비록 인간의 제한된 감각으로 도달하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내부적 경험 (experience interieur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시적인 그림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미지가 외시하는 논리적 진술이 아니라 그 그림을 있게 한 형이상학적인 순수 출현 즉 모든 예술적 재현 행위가 시작되는 제로 단계로서 작가의 내부적 경험이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대하여 전혀 논리적 이유를 달지 않는 순수 그 자체의 즐거움이나 희열을 준다.
그래서 작가가 사실주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질적인 메시지는 결코 작가의 경험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림 행위가 반목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경험이 작품에 은밀히 침투하여 자신도 모르는 일종의 ”무의식적 시선(vision inconsciente)"을 발견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하찮은 것과 초라하고 낡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미세한 빛과 색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고 고백하듯이, 작가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오로지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한 충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에는 오로지 상황만 있을 뿐 의미론적으로 분명히 진술되는 구체적인 주제나 제목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풍경은 그 재현 대상과 방식이 무엇이든 순수예술의 전형이 된다. 왜냐하면 장면들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으로 나타나지만 엄밀히 말해 작가 자신의 내부적 경험으로부터 포말로 부서지는 감정의 잔여물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머리를 만지는 청아한 소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 환희에 젖은 부부, 봇짐을 진 노인 등은 더 이상 언어학적 도구로 설명 불가능한 감각의 침전물들이다. 그것들은 또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쓰듯이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일종의 자화상적인 독백임과 동시에 삶의 두께에 반사되어 은밀히 드러나는 무언의 메아리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삶의 애착과 희열을 그림 행위 그 자체로 은밀히 위장시키고 있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정확히 심리학적 의미로 억압된 욕구나 충력을 위장시키는 이전(移轉)으로 이해되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빈 그릇의 지표가 된다. 삶의 긴 굴곡을 지나면서 침전된 경험적인 것과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청명한 눈으로 포획된 것, 그것들은 일상의 겹쳐진 주름 속에서 죽음의 고통보다 삶의 기쁨이, 현실의 절망보다 미래의 희망이 그리고 충동의 본능보다 절제의 미학이 지배하는 존재의 흔적들이다.
이경률 (미술이론가)
*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출신으로 평생을 회화에 전념한 선생은 현재 서울 충무로 박지오 화실을 운영하고 있다.(문의 010-2706-8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