慈旨의 문자가 날아들었다.
“작가님 살려주세요. 유기가 죽었어요. 저도 곧 죽어요. 발바닥에 예비 배터리....r q hi n ” 문자가 멈추고 있었다. 다행히 위치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 시간 그 작가는 광화문에서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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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조리돌림 체험기
대중교통이 멈춘 날, 안국역에서 광화문으로 향했다.
세계적인 빅 스타 공연을 직접 못 보더라도, 같은 공기라도 마셔보겠다는 소박하고도 비장한 꿈을 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기는 실컷 마셨다.
심지어 순환형으로.
차벽과 바리게이트가 만들어낸 현대판 미로, 인파에 밀려 ‘행진’이라는 이름의 유산소 운동을 시작했다. 광화문은 보이지 않았다. 무대? 전광판? 그런 건 상상 속의 신기루였다.
대신 있었다.
초록형광제복과 붉은조명막대, 그리고 한 문장짜리 인생 철학:
“서 있으면 안 됩니다. 계속 가세요.”
그날 나는 깨달았다.
인생은 멈추면 안 된다는 것을.
특히 광화문에서는.
17000보.
헬스장 등록 안 해도 되는 날이었다.
앉고 싶다는 생각은 사치였다.
앉을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철학적으로 부정된 세계였기 때문이다.
겨우 도착한 어딘가—아마 종각 근처—
보안검색, 카메라 가방과 주머니 속의 먼지까지 탈탈 털리며 희망을 품었다.
“이제 좀 쉴 수 있겠지…무대도 보이고 전광판도 보이고 어쩌면 세계적인 빅스타 알현”
세종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도 상황은 동일 했다.
보이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고, 들리는 건 오직:
“빨리 가세요. 계속 가세요. 서있으면 안돼요.” 그리고 곧 깨달았다.
아, 여긴 목적지가 아니구나. 코스였구나.
유턴.
들어오는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이제 곧 공연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길의 끝은 공연이 아니라…
다시 출발점이라는 것을.
인생 2회차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사람들은 분노했고, 질문했다.
“왜 들여보내고 다시 내보내는 거죠?”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국가가 국민 건강 챙겨주는 거야.”
이건 공연이 아니었다.
국가 주도 대규모 걷기 챌린지였다.
참가비: 시간과 체력
보상: 17000보와 깨달음
다음엔 꼭 표를 구해야겠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공기나 마셔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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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헐떡이며 달동네 폐가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누리끼리한 때에 쩐 가로등이 게슴츠레 내려다보고 있는 거친 바닥이 핏덩이들로 얼룩져 있었다. 싸한 공기와 쓰레기가 썩은 역겨운 냄새, 목덜미에 차가운 액체가 떨어져 공포를 증가시켰다. 자욱한 비안개가 전깃줄 위에 물방울을 모아 후두둑 떨어지곤 했다. 그것은 공포를 뭉텅이로 뭉쳐 날아오는 유성 같았다.
숨이 끊어질 듯 가빠졌다. 폐 깊숙한 곳에서 타들어 가는 냄새가 올라왔다. 벽에 손을 짚었다. 축축했다. 빗물이 아니라, 더 끈적한 무엇이었다. 손바닥을 떼자 실처럼 늘어졌다. 핏덩이였다.
고개를 드는 순간, 시야가 일그러졌다. 가로등 불빛이 흔들리며 길게 찢어졌다. 그 아래, 아무도 없어야 할 골목이 있었다. 그 자리에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처럼 서 있었지만, 사람은 아니었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고개는 옆으로 꺾인 채였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어 있었고, 대신 누렇게 부풀어 오른 피부가 천천히 숨 쉬듯 들썩였다. 그 안쪽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나는 소리를 내지 못했다. 비명은 이미 목에서 죽어 있었다.
“다 죽여주지”
그것이 말했다. 입이 없는데도, 소리가 났다.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순간, 어떤 장면이 찢어진 필름처럼 되살아났다. 사람들, 웃음, 손가락질, 그리고 돌. 끝없이 날아들던 돌. 피가 흐르고, 무너지고, 나는 도망쳤다. 아니, 도망쳤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이미 끝났던것이다.
“넌 거기서 죽었어.”
그것이 한 발짝 다가왔다. 발소리는 없었지만, 바닥의 핏덩이가 미묘하게 흔들렸다. 마치 그것을 환영하듯. “여긴… 남은 것들이 오는 곳이야.”
남은 것들.
몸을 내려다봤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가슴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이 가쁜 호흡조차도, 살아있어서가 아니라 남아 있어서였다.
기억이 멈추고 있었다.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도, 가족도, 아무것도.
그것이 내 바로 앞에 섰다. 냄새가 코를 찔렀다. 썩은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썩기를 포기한 냄새였다.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저항할 이유를 잊어버렸다. 손이 내 목을 타고 올라와 턱을 감쌌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얼굴을 벗겨냈다.
고통은 없었다. 대신,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치 너무 꽉 끼던 가면을 드디어 벗어던지는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열렸다. 온통 노랗다. 바닥에는, 방금까지 입고 있던 몸이 널브러져 있었다. 눈이 텅 빈 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표정은 공포도 아니고, 고통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극심한 공포가 가져온 허상이었다. 어쩌면 낮에 있었던 사건의 환영이 텔레파시나 혹은 투시 능력 같은 인간의 초능력에 의해서 홀로그램처럼 뇌의 어딘가에 투사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뇌와 시야를 뒤덮었던 노오란 세상이 빠르게 걷히고 그 자리에 공포를 넘어선 안도가 내려앉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으로 피어오르던 수증기가 사라지듯 공포가 사라졌다.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적인 평안이 찾아왔다. 하늘이 환하게 맑아지며 꽃비가 나비처럼 춤추고 있었다.
이게 바로 해탈의 경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