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언제나 세계의 균열에서 시작된다.
질서와 혼돈, 진실과 허상, 생성과 소멸, 美와醜. 인간은 늘 이중적인 정점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익숙함이라는 마취 속에서 그 모순을 쉽게 잊어버린다.
필자의 작업들은 바로 그 망각된 균열을 다시 드러내기 위한 시도다.
1. 필자의 주요 작업 ‘허물벗기 시리즈’는 인간 존재의 변형과 갱생에 관한 은유였다.
허물을 벗는다는 것은 단순한 탈피가 아니다. 인간은 허물을 벗어남으로서 개과천선을 한다. 새로운 탄생이다. 뱀이나 가재같은 갑각류의 동물들은 허물을 벗음으로 성장을 한다, 곤충이 징그러운 애벌레에서 허물을 벗는 순간 환골탈태를 이루어 아름다운 미의 화신으로 재탄생을 한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끝없는 탈피의 과정이며, 나의 예술은 그 상처 난 껍질의 흔적을 기록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2. 필자의 작업들 중 또 다른 핵심 모티브인 누드 예술은 단순한 신체의 노출이 아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장막 아래 켜켜이 퇴적된 가식과 사실, 욕망과 윤리, 존재와 허위가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균열의 미학이다.
결국 누드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려는 가장 원초적인 시도다.
인간은 스스로를 문명이라 부르며 수천 년 동안 몸 위에 수많은 상징과 규범을 덧입혀 왔다. 옷은 보호의 기능을 넘어 계급이 되었고, 권력이 되었으며, 위선과 체면의 장치가 되었다. 우주 삼라만상 그 어떤 생명체도 자신의 존재를 이토록 집요하게 은폐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실체를 감추고 역할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필자의 누드는 바로 그 지점에 칼날처럼 침투한다.
벗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를 노출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회가 강요한 허구의 표피를 해체하는 철학적 행위다. 피부 아래 숨겨진 인간의 불안, 욕망, 고독, 그리고 존재의 실체를 응시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누드는 선정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가장 인간적인 진실에 가깝다.
문명이 숨기려 했던 본질을 다시 끌어올리는 작업이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모순적인가를 폭로하는 가장 정직한 언어다.
3. 필자는 또 다른 작업을 시도했다.
최근 새롭게 진행 중인 ‘2분법적 미학’은 이러한 연장선 위에서 출발한다.
필자는 내러티브의 대상 앞에 핸드폰이라는 매개체를 삽입한다. 현실 위에 또 하나의 현실을 겹쳐놓는 것이다. 핸드폰 화면 속 이미지는 실제를 복제하면서도 왜곡하고, 기록하면서도 은폐한다. 관객은 하나의 장면 안에서 서로 충돌하는 두 개의 시선을 동시에 경험하며 서로 다른 결을 통하여 전혀 다른 층위를 은유한다.
이는 단순한 오브제의 배치가 아니다.
현대인에게 이미 스마트폰은 이미 생체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또 하나의 눈이며 뇌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정신이다. 우리는 현실을 직접 보기보다 화면 속 이미지로 먼저 판단한다. 결국 진짜 현실은 사라지고, 복제된 현실만이 증식한다. 필자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을 겨냥한다.
‘2분법적 미학’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닌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보이는 것과 감춰진 것, 기록과 조작, 실재와 환영이 충돌하는 층위의 경계에서 관객은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진실은 과연 어느 쪽에 존재하는가?” 아니다. 이미 우주에서 아니 지구에서 진실은 삭제되어 사라진지 오래다. 남은 것은 허상이다. 오래전에 이미 수전 손택은 “사진은 허상의 허상의 허상이다. 플라톤의 동굴같은...” 라고 일갈했다. 그것은 사실이며 고전이다.
필자는 예술이 정답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은 세계의 모순을 더욱 날카롭게 드러내는 칼이어야 한다. 논리로 봉합되지 않는 불편함, 설명되지 않는 아이러니, 그리고 불완전한 인간 존재 자체. 그것이야말로 필자가 추구하는 illogical art의 본질이다. “예술은 논리가 아니다.”
결국 예술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끝없이 증명하는 행위의 블랙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