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고 만난 초원

입력 2026년06월24일 10시07분 김가중 조회수 90

 

"나는 몽골에서 누드를 찍으러 갔다.그런데 돌아와 보니 벗은 것은 모델의 옷이 아니라 내 고정관념이었다.“

 

산을 내려와 도착한 곳은 호텔이 아니라 거의 냉장고였다.

방은 두 평.

아니다.

두 평도 과장이다.

숨을 크게 쉬면 벽지가 놀라 움찔할 정도.

침대 하나 놓으니 방이 끝났다.

의자 하나 들어오면 사람 하나는 체크아웃해야 되는 구조.

만약 추워서 야외촬영을 못하면 이 방을 스튜디오로 써야 한다.

그런데 모델이 팔을 벌리면 벽을 친다.

다리를 뻗으면 문이 열린다.

누우면 화장실이다.

사진은 찍기도 전에 건축학개론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판이었다.

공항에서 산 위에서 맞았던 추위가 아직도 내 귓속을 씹어먹고 있었고, 그 호텔은 귀신조차 "여긴 좀..." 하고 발길을 돌릴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그때였다.

우르르르르.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직감했다.

올 것이 왔다.

문이 열리자 몽골 청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열 명.

아니 스무 명.

아니 초원 전체가 들어온 것 같았다.

순간 나는 인간이 아니라 초식동물이 되었다.

녀석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굶주린 늑대였다.

아니...

몽골에서는 저걸 늑대라고 안 한다.

개라고 한다.

참으로 무서운 나라다.

우리나라에서 "개 같은 놈."

몽골에서는

"늑대 같은 개."

욕인지 칭찬인지 본인들도 헷갈릴 것이다.

지금도 그들은 겨울이면 늑대를 잡는다.

칭기스칸 시절에는 활.

지금은 총.

문명은 발전했는데 늑대입장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

죽는 건 똑같다.

그중 한 놈은 눈빛이 이상했다. 화색 눈알을 통하여 뇌가 보일 지경이다.

검둥수리.

날개를 펴면 3미터.

눈을 뜨면 내 영혼까지 압류할 것 같은 시선.

그 새가 겨울이면 한국까지 놀러 온다고 한다.

아마 임진강에서 철새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자기 머리 위를 날아가는 저놈의 친척이 몽골에서는 사람 멘탈도 뜯어 먹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타난 거인.

다시카.

그 인간은 서 있기만 하는데 지평선이 좁아졌다.

배는 앞에 있는데 얼굴은 구름 속에 있었다.

내가 말을 하면 배가 먼저 듣고 얼굴까지 전달되는데 3초쯤 걸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는 더 가관이다.

한마디 하면 초원이 메아리를 치는 게 아니라 초원이 사과를 한다.

"죄송합니다."

괜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도 같이 사과했다.

 

이번 작업을 위해 움직인 청년들만 스무 명 가까이 된다.

호텔 사장.

버스회사 사장.

운전사.

통역.

친구.

친구의 친구.

친구의 사촌.

사촌의 말.

말의 친구까지.

몽골에서는 사람을 한 명 부르면 생태계가 같이 온다.

 

나는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내 청년들.

혹은

내 형제들.

그리고 선언했다.

"절대복종.“

 

사실 나이가 제일 많은 건 나였다.

그런데 초원에서는 연장자가 권위가 아니라 고기의 숙성도에 가깝다.

늙으면 바람이 먼저 먹는다.

역사책을 보면 노인에게는 먹다 남은 뼈다귀를 던져줬다느니,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아내를 맞이했다느니,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았다느니,

현대인의 도덕책으로 읽으면 혈압약이 필요한 대목이 즐비하다.

그러나 초원에는 초원의 법이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법이 하나 있었다.

누드는 반드시 찍는다.

그 법 하나 때문에 나는 스무 명의 거구들을 상대로 감독 노릇을 하고 있었다.

가끔은 내가 감독인지,

납치범인지,

인질인지,

후원자인지,

후원받는 사람인지,

나도 잘 몰랐다.

 

훗날 한국 방송에서는 우리를 보고 조폭 같다고 했다.

말조차 웃을 일이다.

조폭?

천만에.

조폭은 돈 때문에 움직인다.

우리는 예술 때문에 움직였다.

그러니 더 위험했다.

예술은 술보다 독하고,

종교보다 집요하며,

사랑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게다가 말이 웃긴 것은,

세상에서 가장 잘 웃는 동물이 말이다.

입술을 뒤집어 까며 낄낄거린다.

그래서 방송국 사람들이 우리를 조폭이라 부를 때마다 나는 말 생각이 났다.

말도 웃는데 사람이 안 웃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대충 다음 날 일정을 정했다.

"새벽 다섯 시 출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끄덕였다.

속으로는 이미 죽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잠이 안 왔다.

내일은 누드를 찍는다.

영하 30.

초원.

강풍.

몽골.

생각해 보니 이건 예술 프로젝트가 아니라 보험회사가 싫어할 여행상품이었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아니,

잠이 든 것이 아니라,

내일 살아 있을지 모르는 인간의 예행연습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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