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똑바로 알기

입력 2015년09월18일 12시26분 김가중 조회수 2616

한국사진방송 김가중 화요강좌 연재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똑바로 알기, 한국사진방송 김가중 화요강좌 연재1

 

몇 주 전에 배택수 교수님 강좌에서 브레송에 대해서 해박하고 자세하게 강좌를 해 주셔서 많은 이들이 브레송 작품에 대해서 아주 쉽게 이해를 하셨을 것이라고 본다.

 

아마도 사진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접하는 이가 브레송일 것이다. 필자역시 사진을 막 시작하면서 브레송이 한국으로 보낸 짧막한 메시지 한 장을 받아들고 고민도 많이 했고 크게 깨달음도 얻었다. 당시에는 필자나 브레송이나 다 팔팔했던 때이다.

이 멧시지는 후에 김가중의 인식론이라고 명명되며 제법 많은 이들에게 김가중이란 이름이 회자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이론에 심취한 강현일 감독께선 필자에게 큰 임무를 부여하여 김가중 식 누드촬영교실의 비디오 영상물을 직접 감독하고 제작하기도 하였다. 가야비디오 사에서 제작한 이 영상물은 누드콘텐츠로서는 이례적으로 대박을 내었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연말이면 한국음반대상이란 영화의 대종상과 거의 맞먹는 큰 시상축제가 있었다. 문화체육부(당시명칭), MBC문화방송, 일간스포츠가 주최하였는데 음반이나 비디오 영상물에겐 대단히 중요한 상이었고 그해의 대상은 가수 김건모가 받았다.

우리 영상물은 최우수상, 각본상, 감독상, 기술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는데 누드영상물이 이 정도로 올라간 것은 가히 획기적이었다.

이것은 워낙에 이슈가 커서 이 영상물에 올 누드로 등장했던 하영은()한국누드모델협회장)” 씨는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주병진 쇼에 출연하여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 바이런이 자고나니 유명해졌더라,“ 명언을 남겼는데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때의 성공을 여세로 한국최초의 불록버스터 누드영화 마고를 제작하여 철저히 내려앉고 말았는데 이때의 이념이 바로 인식론이었다.





 

인식론은 사실 부레송의 메시지에서 기인된 이론이었다.

브레송이 보낸 멧시지에

 

촬영은 인식이다. 자신의 감정과 기술과 안목이 동일궤도상에 일치하는 것이 곧 사진이다. 고로 사진가는 자신과 대상에 대해서 최대한 존경을 기울려야 된다.”

 

일테면 결정적 순간을 얘기한 것인데 당시의 필자는 이 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식당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이듯이 카메라를 3년쯤 메고 다니면서 이 말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때 또 한분의 귀인을 만나는데, 바로 월간 영상지의 이달희 사장님이었다. 필자의 작품과 필자의 하는 말을 듣다 말고 김 선생 영상지에 글 한번 써보소” 20대의 젊은 무명작가에다 변변한 학벌조차 없는 인간에게 당시에 떠그르르한 유명 잡지의 지면을 할애한 것은 확실히 획기적인 기행이었다. 당시에 이달희 사장님은 사단의 기인으로 명명되던 분이었다.

이때부터 마구 써 갈긴 글들 또한 꽤나 괴팍스러운 기행(?)이었던 것 같다. 10여년간 글도 쓰고 작품도 실으면서 호사를 누렸다. 이때 쓴 글의 이념이 바로 인식론이었다.

헌데 브레송과 필자는 사진의 성향이 정반대다.

브레송은 우선 보도 사진가였고 어떤 조작이나 왜곡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눈높이에서만 사진을 찍어내었다. 하지만 필자는 테크니컬을 넘어 온갖 조작과 연출 등 작위적인 작품을 주로 하였다.

하지만 훗날 브렛송의 작품과 내 작품은 그 뼈다귀가 같은 뿌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이 강좌를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브레송의 사진세계가 식자들에 의하여 얼마나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가를 ....그로 인하여 브레송 사진이 얼마나 어려운 사진이 되어 있는가를....

이 사실을 증명해보이기 전에 필자가 최초로 대한 브레송 전시회에 대한 소감부터 말하겠다. 물론 이 전에도 브레송 작품을 많이 보았겠지만 단편적이었고 기억에도 없다. 브레송 개인전을 최초로 보게 된 것은 파리에서였다. 이때는 이미 이승으로 떠난 지 2년이나 된 후였다. 이른바 '브레송 서거2주기 기념전'이었는데 파리의 개선문 안에 있는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사진들이 평범했다. 드골장군이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의 활주로를 걷는 장면, 총을 든 군인들, 탱크, 파리시내 등등, 2차 대전 당시에 종군기자로서 전쟁과 정치의 이모저모를 촬영한 그저 그런 기록 사진들이었다. 우리네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게시판에 붙어 있는 그런 사진들이었다. 저런 사진들을 찍는데 사진을 고도로 연마하고 수련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표준렌즈와 아이레벨과 노말현상과 노말인화면 충분한 사진들이었다.

프랑스란 국가에서 최고의 예술가로 서거 2주년을 떠들썩하게 기리는 것을 보고 프랑스란 나라는 예술가를 무척 우대하는구나, 그리고 그 이득을 알뜰히 챙기는 나라구나 하는 인상 이상의 그 어떤 감동도 받지 못했던 것이 브레송 사진전을 본 느낌이었다.

계속

 

 

동영상 촬영: 이종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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