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그리고 그 사람
[사람과 산]1996년 9월 태백산 특집에 실린 그의 사진
사진에 본격적으로 빠져들던 1990년대 초반에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강원도를 누비며 갓 알게 된 사진 세계에 흠뻑 취해 있었다. 당시의 어느 늦은 가을날,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토요일 심야에 출발하던 관례대로 그 날도 밤 11시에 강원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먼저 사진을 시작한 선배 겸 동료가 이번에는 태백에서 만날 사람이 있다며 그 인물에 대해 장황한 칭송을 늘어 놨다. 그러나 실은 그 인물에 대해 별 흥미가 없었다. 당시 나 스스로는 ‘내가 찍으면 달라도 뭔가 다를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였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랐다고밖에 할 수 없는데…‥.
지금보다 모래사장이 넓었던 추암에서 일출 작업을 마치고 부랴부랴 태백 피재의 고랭지 채소밭으로 달려가 아침 소경을 담았다. 피곤한 상태로 태백 시내로 들어와 우리끼리 ‘전국 최고’라고 극찬하던 본전식당의 해장국으로 늦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먼저 도착했기에 태백역 앞으로 다가오는 그를 먼발치에서부터 지켜볼 수 있었다.
강한 햇살임에도 모자를 쓰지 않아 정리한 적이 없어 보이는 긴 머리칼이 그대로 드러났다. 검은색 전투복은 상당히 바래버려 남루한 모습이었는데 맨발로 신은 군용워커가 눈에 띄었다. 여행다니며 익히 만나는, 시골스럽고 남루한 장년의 모습이었다. 마음이 넓지 못해 대인관계가 원래 편협했던 나는 그 분과의 만남이 내키지 않았으나, 내색할 입장이 못 되어 그 상황을 그냥그냥 받아들이고 있었다. 빨리 만남이 끝나기만을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그는 인사하는 내 동료에게 다가와 덤덤한 목소리로 “왔네~”하고 슬쩍 어깨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누구신지’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 성성한 눈길을 보는 순간, 그만 나도 모르게 “안녕하십니까?”라며 인사를 하게 되었고, 이 양반 앞에선 어떤 거짓말도 할 수가 없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탁트인 이마에선 생기가 분명하게 느껴졌고 예상하지 못한 강한 호감이 일어났다.
이후, 약 2년 동안 태백을 방문하며 그와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잦아졌다. 정확히는 배울 기회를 얻었다. 주로 내 동료가 무언가를 묻거나 감상을 얘기하면 그는 그저 짧게 답하는 형식이었고, 난 어깨너머로 귀동냥하는 입장이었다. 더러는 나와도 대화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내 동료가 흠모하는 선생이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를 중퇴하였으나 현재는 필름은행에 필름원고를 대여하여 생계를 꾸리고 있는 직업사진가였다. 그러나 자신의 D&P점도 없고, 사협회원도 아니었으며 태백에서도 주변 지역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백을 대표하는 작가이며 이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태백 지역의 생태 연구차 서울에서 교수단이 방문하였을 때 그가 안내를 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심 그가 그만그만하게만 느껴졌다.
그 후, 그의 집까지도 방문할 기회도 있었고 이런저런 세상일도 대화를 나눌 일이 있었다. 그러나 2년 정도가 지나자 이 사람 밑에 있다가는 그의 흉내만 내다가 끝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계속 태백행을 고집하는 동료와의 동행도 그만두고 혼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렀고 나의 사진 생활은 생활에 파묻히며 열기가 식어갔다. 약 7년 정도 아예 출사 자체를 하지 못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아마 10년 정도가 지나서였을 것이다. 코엑스에서 개최된 사진영상기자재전을 들렀는데, 한 쪽의 꽤 넓은 공간에서 어떤 전시회를 하고 있었다. 뭔가 하며 들렀는데 눈에 익은 작품들이었다. 대개가 그와 함께 다니며 작업을 했던 태백 지역을 다룬 작품들이었다. 그가 퍼떡 머리에 떠오른 순간, 카메라를 메고 땀을 흘리며 한 쪽에 서 있는 그를 보았다. 무작정 반가운 마음에 휩싸여 급히 달려가 인사를 드렸다. 그 역시 날 알아보고 “웬 일로…‥” 특유의 저음으로 인사를 건네 왔고 담담하면서도 반가운 눈길을 전해왔다.
그 전시회는 삼성카메라가 주관한 것이었다. 삼성카메라 측에서 자신들이 제품화한 카메라로도 이렇게 찍어낼 수 있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그에게 작품을 의뢰하였고, 이에 따라 그가 삼성의 소형 카메라로 찍은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것이었다. 부랴부랴 음료수를 구해 대접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빛나던 장발이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나이가 들었음이 여실했다. 그리고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음을 느꼈다. 그 날 이후 오늘까지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나는 그가 월간지 [사람과 산]에 실은 사진을 잊지 못한다. 태백산 천제를 찍은 작품인데, 밤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산에 오르는 사람들의 행렬이 붉은 선들로 연결되어 천제단에서 수렴하고 있었다. 그 위로는 원을 그리는 별들의 궤적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마치 밑에서 올라온 그 붉은 헤드라이트 선들로 인해 성화불이 타오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태백산을 소개하는 글을 보조하기 위해 실린 사진에 불과했으나, 그 작품을 보는 순간 엄청난 서기를 느꼈다. 그리고 ‘분명 나는 이런 작품을 찍을 수가 없다’, ‘아예 나는 이런 장면을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라는 생각이 머리를 울려댔다. 후에 그에게 들은 설명에 따르면, 맞은 편 산(지금은 그 산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밤부터 새벽까지 약 6시간 동안 셔터를 열어 놓고 온전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그가 여름에는 오로지 검은색 반소매 티를, 늦가을 이후에는 그 위에 검은색 전투복만을 걸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단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게다가 낡은 군화는 늘처럼 맨발로 신었을 것이다. 늦가을 밤사이 엄청나게 시려왔을 추위를 아마 그는 그 상태로 감당했을 것이다. 게다가 교통수단이 없는 그는 내내 걸어서 다녔을 것이다. 함께 다니던 그 때에도 우리가 끼니를 대접하면 무심하게 먹고 아니면 건너뛰고 작업을 하였던 기억이다. 그럼에도 그의 눈엔 빛이 있었고, 이마에는 생기가 돌았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내가, 처음 만났던 당시의 그의 연배에 이르렀다. 그를 벗어나고 싶어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나, 지금은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한다. 그를 좀 더 따라 다니며 자연을 느끼고 보는 마음과 시각을 배웠어야 했다. 젊던 날 굴러 들어온 기회를 스스로 박차버린 만용을 몹시 후회하고 있다. 오히려 이제, 출사를 갈 때마다 그를 찾는다. 과연 이 시각 여기에서 그라면 작업을 했을까? 했다면 어떤 마음으로 했을까? 내가 담은 내용을 과연 그가 공감해 줄 것인가? 라며 홀로 습관처럼 그를 찾는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장소를 누구에게도 감추는 경우가 없었다. 언제라도 누구라도 기꺼이 동행하였다. 그가 장소를 거리낌 없이 공개하는 까닭을 이제는 짐작해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신감이라는 생각이다.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찍는다 해도 그는 자신의 시각으로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본다. 타고난 재능, 단련된 경험, 생활의 절박함이 포개지면서 무리에 섞여도 뚜렷이 구별되는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고 본다.
지금은 진심으로 그를 존경한다.
그는 목적지에 이르러서는 어디가 포인트이며 어떻게 담아야 한다는 말이 없다. 단 한마디, “여기야, 잘 찍어봐” 이것이 전부였다. 더 물어봐도 “잘 찍으면 되지.” 정도만 덧붙였다. 그러나 이따금 그는 자신의 필름을 기꺼이 보여 주었다. 잘된 것만 잘라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상한 필름롤 전체를 보여주었다. 그런 필름을 접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아, 이거구나”라며 감탄을 하였고 모범답안을 본 것처럼 눈이 확 뜨이는 경험을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가 그 포인트를 확인하였고 그의 작품을 흉내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마치 우리가 찾아낸 보물인 것처럼 으시대기도 하였다.
그는 소형카메라 한 대로 작업을 하였다. 그것도 귀족적인 카메라가 아니고 일제의 범용카메라였다. 어느 날 내가 혼자만의 결정으로 중형(6X9싸이즈) 카메라를 장만하여 세팅했을 때, 그는 그저 넌지기 보기만 하고 아무 언급이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난 뒤 그는 지나가듯 “우리 풍광은 큰 걸로 담지 않아도 되지 않아?”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속으로 “무슨 말씀, 선명도가 다른데!”라며 그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쳤다. 지금 나는 네 대의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두 대는 소형이고 두 대는 중형이다. 그런데 지금은 자꾸만 그의 결론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 대만 남겨도 충분하겠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 조건을 초초하고 절박하게 요구하지 않았다. 일출을 기다렸으나 날씨가 흐리면 흐린 조건에 적합한 장소로 옮겼고, 갑자기 비가 내리면 비오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자신을 돕는 사람이 없는 경우, 그는 늘 홀로 타박타박 걸어 다니며 작업하였다. 기대했던 조건이 나타나지 않을 때 ‘삼대가 선행을 해야 어쩌고 저쩌고, 어제 목욕재계개를 했니 안했니.....’이런 류로는 농담도 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아직도 그를 흉내 내지 못한다. 아직도 날씨를 탓하며 발걸음을 돌리는 수준이다.
이제 곧 유월이 다가온다. 당시의 한 겨울에 추암 일출을 담으려 애쓰던 우리에게 그가 나직한 음성으로 짧게 던진 말이다. “유월에 추암으로 한 번 가보지 그래…‥” 후에 다른 친구와 별 기대 없이 습관적으로 추암에 들렸다. 밤새 이런저런 얘기로 밤을 꼬박 새고 맞이한 새벽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려기 시작하였다. 관망하던 우리는 결국 삼각대를 접고 태백으로 가기 위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추암을 벗어나 7번 국도에 합류하기 직전 바다를 보니 멀리 한 쪽 구석에 조그만 원형의 빛이 보였다. 나는 일행에게 태백으로 일찍 가봐야 작업에는 별 차이가 없으니 차라리 다시 추암으로 돌아가 저 빛을 좀 더 기대해 보자고 하였다. 우리는 급히 돌아가 다시 삼각대를 펴고 카메라를 준비하였다. 그 날 난 ‘천지개벽’이란 말이 왜 존재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멀리 한 쪽 구석에서 조그맣게 시작된 그 원형의 빛이 빠르게 점점 커지더니 이내 곧 구름과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며 온 세상을 시뻘겋게 적셔놨다. 난생 처음한 경험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모습을 다시 겪지는 못하였다. 흥분이 가라앉으며 그의 목소리가 새록새록 울려왔다. “유월에 추암으로 한 번 가보지 그래…‥” 그 때가 유월이었다. 이제는 유월의 추암이 왜 천지개벽하는지를 깨닫고 있다.
후기 : 생존해 계신다면 노인이 되어 있을 그 분을 지금은 몹시 그리워하며 마음으로나마 사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보다는 독자님들이 우선이기에 감히 ‘그 분’을 ‘그’라고 칭하였습니다. 그 분도 독자님들도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혹 공감하시는 독자님들께서는 금년 유월에 추암 일출을 시도해 보시고 그 이유도 한 번쯤 짚어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