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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자작나무숲으로
-하얀 설경 속에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에 위치한 자작나무숲을 찾았다.
서울에서 버스로 약 3시간 거리. 자작나무숲 입구에는 원대산림감시초소가 보이고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서부터는 차량진입이 안된다. 이곳에서 자작나무숲까지는 3km 거리. 제법 먼 길을 걸어서 가야 한다. 길가에 자작나무숲이 있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다. 숲 탐방을 제외한 임도 왕복시간 만 2시간-2시간 반 정도의 거리. 그동안 내린 눈이 녹지않아 사방은 하얀 설국이다.
인제에는 원대리와 수산리 등 자작나무숲이 두군데 있다.
인제읍 원대리 산75-22번지 원대봉(684m) 자락에 위치한 자작나무숲은 국유림으로 인제국유림관리소(소장 최승열)가 관리하고 있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138ha에 자작나무 690,000본을 조림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그 중 25ha를 산책로 및 유아숲체험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곳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2008년부터 유아숲체험장으로 일부 개방돼 오다가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트레킹인구가 급증하자 산림청에서 6억5천만원의 국비를 확보하여 3km의 진입로를 정비하고 탐방로 3개소(3.5km), 숲속교실, 목교, 전망대 등 8천만을 투입하여 탐방객의 안내를 돕는 시설물을 설치한 후 2012년 10월 23일 일반인에게 정식 개장했다.
원대리 자작나무 숲 탐방은 입구에서 3km의 임도트레킹을 포함 약 10km로 성인 기준 대략 4~5시간이 소요된다. 숲 탐방은 산불조심기간(봄철 2.1~5.15, 가을철 11.1~12.15)을 제외한 연중 입산이 가능하나 입구에서 입산기록 후 도보로 이용할 수 있다.
남면 수산리 자작나무숲의 경우는 원대리에 비해 규모는 더 크나 사유림이다. 제지회사 동해펄프(현 무림P&P)가 10년 동안(1986∼1995년) 600ha(약 181만5,000평, 응봉산 12골짜기) 땅에 180만여 그루를 심었다. 수산리의 경우 역시 수산리∼어론리 19km 임도코스로 5- 6시간 정도의 트레킹 코스가 있다. 임도는 해발 450∼580m에 걸쳐 있는데 대체로 평탄한 편이다. 필자 일행은 이중 국유림인 원대리 숲을 돌아보기로 했다.
원대리 자작나무숲 가는 길은 평길이지만 혹시 미끄러운 곳이 있을까 싶어 아이젠을 신고 출발했다. 입구에서 몇 분 지나자 우측 산비탈에 자작나무숲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갑다. 새하얀 수피를 지닌 나무. 역시 숲의 귀족답다. ‘숲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초입 자작나무숲의 경우 심은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나무들이 아직은 가는 편이지만 군락으로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있는 모습들이 제법 으젓하게 보인다. 특히 만물이 헐벗은 겨울 숲에서 빛나는 새하얀 살결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좌측 비탈에도 자작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자세히 보니 모양도 조금씩 다르다. 줄기에 불규칙적인 상처가 있는가 하면 물고기 비늘처럼 규칙적인 마디를 가진 나무도 보인다.
20-30m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높은 가지인 우듬지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모든 가지를 도태시키는 아픔을 감수한다. 가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검은 생채기가 하얀 껍질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무늬를 연출한다. 아픈 만큼 성숙한 자작나무의 그 나이테 속에는 인고의 세월과 세상의 모든 빛들이 차곡차곡 저장돼 있는 셈이다.
자작나무를 보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영화 <닥터 지바고>이다.
<닥터 지바고>에서 우리들은 '연인을 태운 수레가 끝도 없이 펼쳐진 새하얀 자작나무숲으로 달리는 장면'을 잊을 수 없다. 영화 <차이코프스키>에서도 눈 덮인 자작나무 숲으로 마차를 몰고가는 사람들, 잎새 진 자작나무 숲을 산보하는 차이코프스키를 만날 수 있다.또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 시베리아횡단열차 뒤로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숲, 미모의 미국여자와 러시아 장교 사이에 맺어지지 않는 사랑 얘기가 애절하게 떠오른다.
드넓은 시베리아 평원을 덮고 있는 자작나무 숲이 가을이 되면 샛노란 단풍잎으로 변한다. 카메라가 하이앵글로 하늘에서 내리찍은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숲은 숨막힐 정도로 매혹적인 전경이다. 그리고 만화영화 <빨간머리 앤>에서 주인공이 소꿉놀이하며 놀던 그 숲의 이미지로도 친숙하다.
러시아 문학기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소설 <전쟁과 평화>의 대문호 톨스토이 생가 입구에 도열해 있는 자작나무숲의 멋진 풍경을 기억할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남쪽 240km, 자동차로 3.5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야스나야 빨랴나라는 곳에는 톨스토이 생가와 무덤이 있다. 그 진입로에 있는 끝이 보이지않을 정도의 긴 자작나무숲 터널은 정말 환상적이다.
자작나무는 북국의 식물이다. 북국에 사는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신령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슬라브족은 자작나무를 신이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준 선물로 여긴다. 러시아는 국화(國花)는 없어도 자작나무를 나라의 나무, 즉 국목(國木)으로 여긴다. 동아시아 사냥꾼은 자작나무를 꺾어 움막을 만들었고, 여진족은 자작나무 숲에 인간의 영혼이 머문다는 전설을 믿었다고 한다. 북한 지방에선 자작나무 껍질로 지붕을 얹었고, 염습할 때 주검을 감싸기도 했다. 자작나무는 껍질에 기름 성분이 있어 불이 잘 붙는다. 그래서 자작나무로 불을 밝히기도 했다.
자작나무 껍질은 종이의 대용이기도 했다. 인도에선 자작나무 껍질에 불경을 써서 보관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일부 역시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경주 천마총의 말안장 장식에 그린 천마도의 재료도 자작나무 껍질이다. 새하얀 껍질에 사랑을 고백하는 글을 써 편지를 보내면 사랑을 얻는다는 낭만적인 속설은 청춘남녀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곡우 때 나는 자작나무 수액은 무병장수에 좋고 충치예방에 좋다는 자이리톨도 자작나무에서 추출된다. 나무껍질은 화피라 하여 폐렴, 신염, 급성 편도선염, 옹종, 치주염 등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고, 수액은 화수액이라고 하여 괴혈병, 신장병, 통풍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뿌리는 황달, 지방간, 간경화 등에 사용하여 간을 해독하고 눈을 밝게 한다고도 한다. 활엽수 중 피톤치드가 가장 많은 자작나무가 아토피 피부염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요즘은 힐링장소로도 인기를 모으고 있다. 자작나무에서 자라는 상황버섯과 말굽버섯은 폐암에 효과가 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에선 중부 이북 산간 지역에서 자란다. 특히 개마고원 일대엔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북한에서는 자작나무를 '봇나무'라고 부르고, 껍질을 '봇'이라 한다. 우리가 부르는 자작나무란 이름은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자로는 백화수(白樺樹)라고 한다.
자작나무에 대해 이런저런 상념에 젖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면서 여유있게 걷다보니 1시간 반이나 걸려 자작나무숲에 도착했다. 좌측 발 아래로 비슷한 크기의 자작나무가 하늘을 찌르는 듯 빽빽이 들어서 있다.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듯 경치가 장관이다. 능선 위에는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고 쓰여진 남녀목각상이 세워져 있다.
하얀 설원 위를 수직으로 가득 수놓은 은빛 나무들. 마치 출정을 기다리는 병사들의 사열행사 같다.
이곳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2008년부터 숲의 일부를 ‘숲속 유치원’으로 꾸미기 시작, 지난 해에는 총 3.5km에 이르는 세 개의 숲 탐방로도 조성했다. 제1코스는 자작나무코스 0.9km, 제2코스는 치유코스 1.5km, 제3코스는 탐험코스 1.1km 등이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숲이 아니라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나무를 안아보거나 쓰다듬어보기도 하는 등 오감(五感)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인제국유림관리소 최승열 소장은 숲을 활용한 다양한 숲 관련 교육 콘텐츠 개발의 일환으로 조성된 자작나무 명품 숲은 유아는 물론 성인, 청소년 등이 숲에서의 창의적 체험활동 공간의 장으로의 활용이 기대된다고 개장의 의의를 밝혔다.
자작나무숲은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는 새봄과 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 풍경이 환상적이지만 모든 잎을 털고 하얗게 잠들어 있는 겨울 설경 속 풍경 역시 색다른 아름다움과 정취가 있다. 시인들이나 사진작가들은 오히려 동양화같은 순백의 겨울 자작나무숲을 더 좋아할런지도 모른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길을 걷다보니 세상의 시름이 잊혀지고 마치 동화의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다. 숲 정령들의 잔잔한 속삭임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자작나무(Birches' 한 구절처럼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있는지 나는 알지못한다. 나는 자작나무를 타듯 살아가고 싶다’(글,사진/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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