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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
환한 고요 속에서 응시하는 시간의 흔적들
조창환 시인 여덟번 째 시집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 펴내
조창환 시인이 그의 여덟 번 째 시집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을 펴냈다.
조창환 시인은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 <빈집을 지키며>, <라자로마을의 새벽>, <그때도 그랬을 거다>, <파랑눈썹>, <피보다 붉은 오후>, <수도원 가는 길>, <마네킹과 천사> 및 시선집 <신의 날>, <황금빛 재> 등을 펴냈다. 한국시인협회상, 한국카톨릭문학상, 경기도문화상 등을 수상하였고, 현재 아주대 명예교수로 있다.
사원 어느 날, 만개한 벚나무 아래, 나무벤치에 앉아
겨울 눈보라처럼 쏟아지는 꽃잎 치어다보다
저 꽃잎들 어느 목숨이 흘린 키스 자국인가 생각한다
빛 고요하고, 바람 촘촘하고, 가슴 먹먹하다
한 꽃잎이 다른 꽃잎을 흔들어 끌어안고 몸부림친 흔적들이
허공에 가득 부푼 팽팽한 허기를 메꾸어준다
삭발한 여승처럼 파르스름한 하늘의 오장육부를 씻어 내리는
저 키스 자국은 세상에 없는 눈물 자국인 것을 생각한다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저 흔적은 바보하늘의 오장육부를 씻어 내릴 것이다
봐라, 벚나무 아래 잠들었던 나귀가 활짝 웃는다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 전문
조창환 시집 <벚나무 아래, 키스자국>은, 시인이 등단 40년을 맞아 펴내는 오롯한 성과로서, 오랜 시간 고요 속의 응시를 통해 마음의 풍경을 채집한 선명한 결실이다.
유성호 평론가(한양대 교수)는 “이번 시집에서 조창환 시인은 시간의 흐름 속에 남는 존재론적 표지(標識)로서의 ‘흔적’, ‘자국’, ‘자리’, ‘얼룩’, 등 이른바 ‘잔상(殘像)’의 미학을 담은 풍경들을 담아낸다. 시인은 환한 고요 속에 남은 시간의 흔적들을 응시하고, 그 흔적들의 흐름을 따라 펼쳐지는 고요한 풍경들을 섬세하게 그려 보여준다”고 말한다.
유성호 평론가는 이어 “조창환 시인의 시세계는 엷은 비애에 감싸여 있거나 생의 상처에 집착할 때에도 궁극적으로 밝고 환한 세계를 지향하는 특성을 지닌다. 그렇게 밝고 환한 세계를 지향하는 시인의 감각은, 저물어가는 기운과 밝아오는 기운을 절묘한 균형으로 바라볼 줄 아는 중용적 의지의 산물이다. 그럼으로써 삶의 근원적 경험을 심미적으로 형상화하고, 격정과 내성을 내밀한 균형감각으로 통합해내는 원숙한 시적 기율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천 년 전에 다녀간 바람소리 좋구나
바람에 물고기 흔들리는 소리 좋구나
물고기는 빈 입으로 메밀묵 씹는 흉내를 내다
천 년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러니 참 좋구나
쑥 향기 나는 블랙홀 어디쯤
저 물고기 전생이 있을 것인가
힌 소가 달을 물고 바다 밑에서...
그 바람소리에 털이 돋아?
아무튼, 참 좋구나!
<아무튼, 참 좋구나> 전문
이성혁 평론가는 “조창환 시인의 이미지들은 서로가 서로를 품고 있다. ‘힌 소가 달을 품고 바다 밑에서’와 같은 시행을 보라. 대지와 하늘과 바다가 어우러져 서로 스며들고 있지 않은가. ‘삶 다 마친 염소’와 ‘옷 다 벗은 나무가’ ‘안고 안기’며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장면을 그린 시 역시 그렇다. 이 시들은 이미지들이 서로를 품고 있는 세계의 존재방식에 관하여 시인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김종삼 시 <라산스카>에 나오는 ‘라산스카’라는 말을 자꾸 되뇌어 보다가 ‘오르간’ 소리를 듣게 되는 것처럼 세계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을 들을 때의 기쁨을 느낀다”고 평한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오래 바라본다
이승과 저승 사이
시들지않는 건들거림
모과 냄새 묻은 적멸寂滅
이런 고요는 모란꽃 같다
수련 잎 얼비치는 잠 속에서
나비가 날개를 말리고 있다
<이런 고요> 전문
시인이 바라보는 것은 일차적으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지만, 사실 그 오랜 바라봄의 대상은 시인 주위로 몰려온 ‘고요’일 것이다. 불상의 ‘시들지않는 건들거림’과 ‘모과 냄새 묻은 적멸’은 모두 이승과 저승 사이를 잇는 어떤 고요하고 아스라한 힘들이다.
유성호 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고요’를 향한 미학이다. 그야말로 ‘고요’에 한없이 근접한 ‘소리’의 미학을 통해, 시인은 인간 존재를 파악하는 것이 이성적으로만이 아니라 감각적 현존으로도 이루어진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점에서 조창환 시인이 견지하는 언어감각은, 서정시가 끝없이 우리의 현재형을 탈환하는 고요한 역동의 세계임을 명징하게 확인해준다”고 말한다.
힌 눈 내린 새벽 아무도 밟지않은 새길 떠나는 날
바다 위에 청보리 가득 그려 넣는 날
연잎에 내린 이슬 모아 마리아상 만드는 날
물비늘 반짝이는 구름 바라보는 환한 날
여린 뿌리가 타고난 당길심으로 흙덩이 끌어안는 날
수경재배水耕栽培 하듯 시 쓰는 날
<환한 날> 전문
유성호 평론가는 “다음으로 이번 시집에서 눈에 들어오는 권역은 ‘시’에 대한 메타적 탐색의 지향이다. 조창환 시인은 ‘시’가 자아 탐구와 심미적 욕망의 불가피한 형식임을 적극 사유한다. ‘시인’이란 지워진 언어를 발견하고 그 언어에 새로운 미적 경험을 부여하는 존재가 아닌가. 조창환 시인에게 ‘시’란 이러한 존재론적 발견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스스로를 완성하는 호환할 수 없는 배타적 기율이기도 하다”고 평한다.
조창환 시인은 시집 앞머리에서 “밝음과 맑음, 공손함과 순함이 있는 다른 세상에 관하여 자주 생각해 본다. 바다 밑 같은 고요와 큰 나무그늘과 같은 안온함이 있는 세상은 자유롭고 넉넉할 것 같다. 지상에서 그런 시간이나 공간을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할 것인가? 먼지와 때와 얼룩이 가득한 일상의 삶을 넘어서는 길의 하나는 그런 시를 쓰는 일이다”라고 술회한다.(정리/임윤식)
*펴낸곳 : 서정시학, 정가 :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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