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바람에도 바스러질 듯 엷은 미소를 짓는 아이를 만났다. 초여름 한낮의 볕을 고스란히 받아 머리에 이고 있었으므로 그 아이의 원래도 얇은 얼굴이 더욱 가냘프게 보였다. 너른 벌판에 온통 상기된 얼굴로 우리들을 기다렸나보다. 바람 불 때마다 술렁거리며 저들끼리 수근 거린다. 그 벌판에 들어서기 전부터 웬일인지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화단에 양귀비 몇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그 화단엔 봉숭아꽃도, 코스모스도, 그리고 맨드라미 과꽃까지 가득 차 있어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는다. 나는 그 꽃그늘 아래서 이 꽃잎 저 꽃잎을 소꿉놀이를 했다. 양귀비 붉은 꽃잎을 따서 돌돌 말아 채를 썰어 놓고, 코스모스 이파리를 따서 나물반찬이라며 병뚜껑에 담아내 곤 했었다. 그렇게 여름이 가고 어머니는 뿌리째 뽑은 양귀비를 처마 밑에 거꾸로 매달아 두셨다. 대롱대롱 씨앗이 땅바닥을 쳐다보며 말라가고 있었고.
양귀비밭 언저리에서 배가 아파왔으므로 코를 벌름거리며 꽃향기를 맡아 봤으나 예전의 그 쌉싸름한 향기는 나지 않않다. 아편이라 해서 재배가 금지 된 식물을 그 너른 벌판에 심어 놨을까마는 개양귀비를 보고도 떠올리는 유년은 양귀비 꽃잎처럼 얇아져버린 추억이 되었다. 여름을 장악하겠다는 듯 붉은 벌판의 미소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의 더위도 잊게 만들었다.
두해살이 식물이며, 양귀비꽃을 관상용으로 개량해서 꽃을 본다. 전초에 털이 있고, 잎은 어긋나고 깃꼴로 갈라지며, 갈라진 조각은 줄 모양 바소꼴로서 끝이 뾰족화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개양귀비꽃 또는 꽃양귀비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흔히 아는 아편 성분이 있는 양귀비꽃과의 구분의 쉬운 방법은 식물에 난 털로 구분한다. 양귀비는 털이 없고 잎이나 줄기가 반질반질하다. 반면 개양귀비꽃은 솜털이 많다. 사진 애호가들은 개양귀비꽃의 솜털을 역광으로 찍기를 즐겨 하기도 한다.
꽃말은 색깔에 따라 다르다. 주홍빛 개양귀비는 [약한 사랑, 덧없는 사랑‘, 흰양귀비는 [잠, 망각], 붉은양귀비는 [위로, 위안, 몽상] 자주양귀비는 [허영, 사치, 환상]을 의미 한다. 또 한 가지는 [쓰러져간 병사]로도 알려져 있는데, 세계1차 대전 때 황폐한 벌판에 병사들을 묻고 비통해 하는데 허허벌판 끄트머리에서 함께 울어 주던 붉은 꽃이 양귀비였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나보다.
양귀비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미인이 입가에 맴돈다. 당현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여인. 천하를 미모하나로 어찌할 줄 알았던 그 여인의 호시절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을 낳게 하지 않았을까. 예나 지금이나 미인은 어딜가나 대접받는 사회이고 보면, 화무십일홍이 아니고 화무만년홍이 아닐까 하는 나만의 고사성어를 만들어 본다.
얇은 종이를 구겨 놓은 것 같은 꽃잎을 바라보고 있으면 까닭모를 안쓰러움이 인다. 어쩌자고 활짝 웃지도 못하고, 웃음 사이사이에 주름을 지어야 할까. 백조가 우아한 미소를 머금기 위해서 물 밑에서 겪는 수많은 발길질을 해야 하는데 그와 닮지 않았을까 떠올려보는 여름 한낮.
묘지 옆 고흐가 그렸던 보리밭에는
어린 보리이삭 사이에 빨간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지
내 머리 위에 그 양귀비꽃을 심어주게 /타까미 쥰[양귀비꽃 중 일부]
미인(?)과 함께라면 죽음도 황홀하겠다는 뜻이었을까. 일본시인이 쓴 시는 몽상 중에 썼을 거란 상상을 해 본다. 내가 미인이 아닌 관계로.
며칠 전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다 봤는데, 관상용으로 심어 놓은 개양귀비도 씨가 떨어져 해마다 자생하다보면 야생화를 기질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꽃을 보는 그 자체, 멀리서 개양귀비를 보고 찾아가는 그 걸음에 이미 아편 성분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개양귀비밭에 들어서서 한나절을 즐겁게 보냈다면 이미 우리들의 심신은 충분히 치료가 되었을 거다. 어린 기억에 남은 양귀비 씨앗 몇 톨 입에 넣은 것처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