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어느 새벽,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한 번 깬 잠은 다시 누워 청하는 나를 외면했다. 세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어서 사방은 캄캄한데 뭘 해야 할까 잠시 망설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가 이불을 걷어차고 자동차 시동을 걸게 만들었다. 내비게이션에선 고한역까지 290.8km라 알려준다. 시간으로 따져보면 약 네 시간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조금 무리다 싶었지만 나도 모른다. 그 새벽에 왜 외곽순환도로 위를 질주 했는지.
고한에 도착하자마자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12월 초여서 함박눈은 내리자마자 녹아버렸지만, 아무도 없는 언덕에서, 고한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서서 혼자 감격스러워했다. “그래, 나의 고향방문을 이렇게 환영해 주는구나. 하늘도......” 나를 위해서 내리는 눈이라 믿는 바보가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그 순간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나의 금의환향을 반기는 듯 그렇게 펑! 펑! 함박눈이 내렸다.
일단 시내를 돌아보며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고한역을 중심으로 좌우로 한 바퀴 도니 짧게 끝난다. 그 시절, 여덟, 아홉, 열, 열하나 꼬맹이였을 그 시절엔 시장도 엄청 크고 학교도 너무 넓어서 운동장 끝을 볼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는데, 손바닥만 한 도시와 콩 알 만 한 학교가 짐짓 외면을 하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여전사인양 어둠을 뚫고 달려왔는데 싱겁게 하루를 보낼 수 없다. 열 살의 내가 살던 곳을 가 보기로 한다. 예전엔 새마을이라 불리던 곳인데 주소 검색에서 나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갔는데 우리가 살던 곳의 흔적은 하나도 없다. 마을 뒤로 시꺼먼 탄물이 흐르고, 대문 없는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변소는 나뭇가지를 엮어 사방을 가리는 역할만 했을 뿐, 배설물들은 아랫마을, 그러니까 탄물이 흐르는 개울 건너편의 사람들이 신경을 쓰고 자세히 보면 차곡차곡 배설물들이 쌓이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변소가 있던 그 자리. 추억의 그 자리는 새로운 리조트 건설로 한창이다.
씁쓸히 돌아선다. 사십 년 전 이야긴데. 그 시절 그 환경이 그대로 보존 될 리 만무하다는 걸 알면서 “없네, 역시.”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냥 돌아서기가 뭣해 차속에 앉아 멍하니 옛일을 더듬었다. 고무줄을 너무 잘 해 땅꼬마라고 별명을 불러주던 범아할머니, 매일 친구들과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더울 때면 탄찻길 밑, 제법 널찍하고 시원한 곳을 찾아 아카시 잎을 떼어내고 줄기를 머리에 돌돌 말고는 하루 종일 파마가 되기를 기다리며 공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렇게 유년의 추억이 어린 곳인데. 탄물은 철분 섞인 약간의 붉은색을 띈 채 작은 내를 이루고 있는데.
작은 길을 따라 예전에 다녔던 학교길이 떠올라 조금 움직였는데, 세상에나. 나를 키워준 그 탄찻길 밑이 보였다. 탄을 실어 나르던 탄차가 다리를 지나고 굴로 들어나는 시점, 그 굴다리 밑에서 매일이다시피 놀았었는데, 그 탄찻길은 녹이 슨 채, 박달나무도 키워내고, 작은 소나무도 키워내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쑥부쟁이도 키워 내면서 그렇게 혼자 놀고 있었다. 희끗희끗 날리던 눈발도 잡아 놓고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광부였던 아버지. 검은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시던 모습, 그 든든한 모습보다 내게 아버지는 콜록콜록 기침을 많이 하시며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기다렸던 모습이 더 많이 각인 되어있다. 오랜 광부생활은 내가 철들기 전에 진폐증을 아버지에게 선물했고, 그로인해 퇴직을 당하고, 대신 엄니가 광산의 선탄부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내 마음엔 작은 체구의 까만 작업복, 그리고 흰머리수건의 엄니가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막교대, 삼교대를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건너게 해 주신 엄니.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자유교양수업을 들어야 하고, 저녁 늦게까지 공부를 하면, 언니가 도시락을 가져다 줬다. 점심에 먹은 감자반찬이 저녁에 또 들어있는 도시락. 낮에는 고춧가루를 넣고 볶았다면, 저녁엔 간장에 조려서 넣어줬다. 학교에 새로 부임하신 초임선생님이 밤에 고한역에 떨어졌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옷이 온통 검어졌고, 온 도시가 시꺼멓게 되어 있어서 많이 놀랐다는 이야기를 할 때, 당연한 이야기를 왜 그리 놀랐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시간. 눈이 내리자마자 검게 염색이 되어 검은 눈덩이가 되거나, 건조한 계절에는 탄가루가 온통 시내를 덮었던 시간.
꾸루룩 거리던 배는 포기 상태로 돌아갔는지 반응이 없다. 그래도 고향에 왔는데 밥은 먹어야지 싶어 역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기에 들어가면서 다 닫았다. 혼자 밥 먹으러 들어가는 뻘즘함을 무마해 보려고 선수를 쳤다. 황태해장국을 시켜놓고 기다리는데 다시 일어나서 창문을 다 닫고 있는 나를 보며 옆 탁자의 아저씨가 웃는다. “탄내 나서 그러지유?” 연탄난로에서 가스가 너무 나오니까 추운게 낫다 싶어 열어 논 창문이었던 거다. 갱속에 들어가서 그 탄을 캐고, 선탄을 하고, 모두 내 부모가 했던 일인데, 이젠 더는 맡지 못할 향수가 되어었다.
고한을 중심에 두고 다시 돌았다. 정암사를 거쳐 만항재에 오르다 길이 미끄러워 포기 하고, 다시 사북쪽으로 향했다. 고한은 정선랜드로 인해 전당포, 그리고 법무사무실 또 한가지 보탠다면 스키의 고장으로 변하고 있었다. 사북역시 마찬가지다. 리조트에 휴양지에. 잘 하고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탄을 캐고 탄으로 먹고살겠단 생각을 했다면 어땠을까. 조그맣게 탄광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이젠 실생활이 아닌 체험으로만 가능한 그 시절 광부의 생활. 오랜 세월이 흘렀고, 세상도 변했고, 또 한가지 변한 것이 있다면, 그 시꺼먼 탄산에서, 탄산이란 말은 사전에 없을 거다. 그냥 탄을 쌓아 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곳에서 나무가 자라고 있었기에 혼자 붙여 봤다. 탄산에는 질퍽한 탄가루들이 모여 박달나무도 키워내고, 낙엽송도 키워내고 있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밀려나기 싫은 탄가루들이 머리를 싸매고 지혜를 모은 결과이리라.
이렇게 과거를 돌이켜 보며 중얼거릴 수 있는 것은 지금의 내가 있기 때문이고, 나를 키워준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고생이라 생각도 안 했고, 그 시절엔 다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다. 내 인생에서 정말로 힘든 시절이 있었다면 고한에서 상주로 이사를 가고 , 몇 살 더 먹고 나서 겪은 일 일 거다. 얼마 전 지인이 현실을 힘들어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에 조금, 아주 조금만 내 힘든 사춘기를 들려줬다. 지금의 내가 웃을 수 있고, 지금의 내가 씩씩하고 당당할 수 있는 건 조금의 의심 없이 유년의 내가 나를 키워 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글: 한국사진방송 /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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