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안의 영동선 일부 철도 간이역이 올해안으로 폐쇄된다는 TV 방송을 보고 올 3월 시간을 내어 동해안으로 기차여행을 다녀왔다. 기차를 타고 내키는 대로 내려서 구경하고 날이 어두워지면 자고 하는 여행을 갈려고 마음 먹었는데, 친구가 동행한다고 하여 같이 가는 바람에 당초의 여행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다.
중앙선 청량리-제천, 태백선 제천-민둥산역, 정선선 민둥산역-구절리 왕복, 태백선 민둥산-동백산, 영동선 동백산-삼척을 갔다가 동해안으로 영주까지 내려갈 예정이었다. 일출 명소인 추암도 가고.
증산역(구 민둥산역) 일대 시가지 풍경(정류장에서 커피를 배달시켜 마시는 노인들)
첫날 청량리에서 9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제천 영월을 거쳐 민둥산역에 하차하였다. 민둥산역은 정선군 남면 무릉리로 예전엔 증산역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민둥산역에서 기차로 아우라지(구절리역-아우라지 폐선)에 갈려고 했으나 오후에 한번 들어가는 기차를 놓쳐서 정선읍에 나가서 강릉행 버스를 타고 중간에 아우라지에서 내렸다.
아우라지에서 구절리까지는 예전엔 기차가 다녔으나 지금은 폐선이 되어 구절리까지는 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구절리에는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고 피서철에 계곡 관광객이 주로 이용하는 곳으로 식당, 가게, 민박집 등이 있었으나 한산한 편이었다. 구절리에서 레일바이크를 타고 아우라지에 도착했다. 아우라지까지 레일 바이크로 30분 정도 걸렸는데 둘이서 페달을 힘껏 밟아도 별로 속도도 나지 않고 제법 힘들었다. 개울을 따라 가는 길이라 주변 경치는 좋았으면 경사진 길이라 크게 힘들지는 않았다.
구절리-아우라지 레일바이크
아우라지에서 사북, 태백을 거쳐 삼척으로 올라가는 기차를 탈려고 했는데 시간이 잘 안맞고 특별할 게 없다고 해서 강릉으로 가서 영동선을 타고 동해안으로 내려가는 기차를 타기로 하고 저녁 무렵 정선읍으로 갔다. 시내와 떨어진 정선역 인근엔 모텔들이 있었으나 식당이 없어 신시가지로 나와서 식사를 하고 모텔에서 잤다. 식당도 별로 없고 숙박 업소도 별로 없어 한참을 돌아다녀서 식사를 하고 숙박 업소를 정했다.
둘째날 정선에서 약 3시간이 걸려 강릉에 도착했다. 중간에 아우라지도 지나고 산골 길을 가는데 산간 경치가 괜찮았다. 고랭지 채소밭으로 유명한 대기리, 왕산리를 지나 11시경 강릉에 도착했다. 강릉을 출발한 기차가 좌측으로 동해안 푸른 바다를 끼고 정동진, 동해시를 지나 1시간반 후에 도계역에 도착했다. 그러더니 뒤로 가기 시작하여 6분쯤 후 나한정역에서 다시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도계-나한정-흥전-심포리-통리를 가던 기차가 앞으로는 터널이 뚫려 나한정,흥전,심포리 역은 폐쇄가 되고 앞뒤로 오가는 기차는 올해 가 마지막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탄 기차는 승부역(하루중 몇 번만 하차)에 서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전 역인 석포역에서 내려서 승부역으로 가기로 했는데 석포-승부역간은 좁은 도로로 택시만 다닌다고 해서 다음역인 양원역에서 내릴려니 양원역-승부역간은 도로도 없고 양원역에는 정차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춘양역까지 와서 내렸다. 그 역에 못내리면 이전이나 다음 역에 내려서 가고자 하는 역에 가면 되는, 일반 상식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춘양역에 내려서 역 직원한테 물어보니 승부로 올라가는 기차가 저녁 7시 40분경에 있고 숙박 업소가 없다고 하면서 이장댁에 전화를 해서 숙박 부탁까지 해 주어서 고마웠다. 승부에는 그 전에는 숙박업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업을 하고 민박만 한다고 했다. 농가주택으로 허가를 받아 펜션 영업을 하다가 영업 정지를 받아 폐업을 했다고 한다.
춘양에서 4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춘양 구경을 했다. 예전에는 동해안에서 봉화읍에 버금가는 상당히 큰 도시로 억지 춘향(주1)이라는 얘기가 춘양에서 유래된 얘기라고도 한다. 예전 시골 읍 냄새가 물씬 나는 풍경이었다. 시가지에는 아파트도 1-2동 눈에 띄었지만 논밭으로 둘러싼 조그만 도시 도로 주변에는 썰렁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방이나 가게, 술집이 늘어서 있고 시장도 들어서 있었는데 다방을 가보니 60년대의 풍경 그대로이고 티켓 영업도 한다고 했다.
(흑백사진첩에서 꺼내든 사진 같은 춘양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춘양 시가지와 재래 시장 풍경
자식을 도시에 다 보낸,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길이 짧은 할아버지의 휴식
밥 8시반경 껌껌할 때 승부역에 도착하니 역에만 가로등이 서있고 깜깜한 산골에 개울물 소리만 크게 들렸다. 춘양역에서 미리 연락을 해 놓아서 승부역에 내리니 역무원이 이장댁 가는 길을 알려줬다. 이장댁에 전화를 거니 역에서 나오면 다리가 있는데 우측 위로 도로를 따라 10여분 쭉 올라오면 첫 번째 집이라고 했다. 랜턴도 가지고 오지 않고 물소리를 벗삼아 어두운 길을 따라 올라갈려니 동행한 친구가 이 길이 맞냐고 자꾸 걱정을 표했다. 이장댁에서 주인 내외와 저녁을 같이 먹고 작은방에서 잤다.
새벽에 일어나 마을을 둘러보니 사방이 산으로 막혀있고 민가는 띄엄띄엄 1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하늘도 3평 땅도 3평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표현이었다. 산을 개간한 비탈 밭에 채소를 심고 소를 키워 내다 팔고, 여름에는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계곡과 숲이 좋아 피서객이 몰려들고, 겨울에는 눈꽃열차가 승부역에 1시간 동안 정차하여 부침개도 팔고 산나물도 팔아서 살림에 보탠다고 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지거나 누리지 못한 것을 동경한다, 그 것이 치열하고 고단한 삶일지라도.
비탈진 산간에 밭을 일구고 살아가는 승부 사람들(새벽 안개)
승부에서 영주로 가는 기차가 아침 08:28과 18:16에 두 번 있었지만, 관광지는 아니라도 오지에 위치한 석포를 가보고 싶었다. 마침 볼일 보러 가는 이장님 차를 얻어타고 석포로 가는데 좁은 산길을 지나니 개천을 따라 산기슭을 가는 가파른 길이었다. 석포는 승부보다도 정차하는 기차는 많았지만 영주행은 오후에 있고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아 택시를 타고 육송정이라는 곳에 가서 영주행 버스를 탔다. 봉화, 춘양을 거쳐서 영주에 도착했다.
동해안 간이역 관광을 할려면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2-3개역을 하루에 돌아볼 계획으로 가는게 좋을 것 같다. 기차가 자주 없고 특히 간이역에 정차하는 기차가 하루에 1-2번에 그치기 때문이다. 당초 의도대로는 되지 않았지만 동해안의 열악한 교통환경과 때묻지 않은 자연을 주마간산격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해야겠다. 다음에 더 시간이 많이 날 때 아우라지랑 승부랑, 시간이 멎은 것 같은 춘양이랑 여유부리며 다시 가보고 싶다.
※ 주 1
억지 춘향('억지춘양'은 틀린 표현)이라는 말의 유래는 3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춘양면 일대의 적송(赤松)은 향기가 좋아 春香木(춘향목)이라고 하는데, 일반 소나무를 춘향목으로 억지로 속여 파는 일이 빈번하여 억지 춘향이라고도 하고, 영동선 개설때 철로가 나지 않게 되었는데 자유당 국회의원이 억지로 춘양 시내로 우회시킨 일이 있어 억지 춘향이라고도 하고, '춘향전'에서 변 사또로부터 억지로 춘향이가 수청 들게하여 '억지 춘향'이 라는 말이 되었다고도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