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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재 개인전 ‘엘랑 비탈(Élan Vital’ 展 토포하우스
2018.9.12(수)-17(월)
토포하우스 1층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11길 6(관훈동) 02-734-7555
전시기획 : 하얀나무 02 313-9539
고원재 개인전 <엘랑 비탈(Élan Vital)>에 부쳐
공포와 황홀의 이중주
- 물질과 대지의 원초적 관계에 대한 상상 -
유헌식(문예평론가, 단국대 철학과 교수)
“익히 알려진 것들은 익히 알려져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아직 인식되지 않고 있다.(Das Bekannte überhaupt ist darum, weil es bekannt ist, nicht erkannt.)” 독일철학자 헤겔(G.W. Hegel)의 <정신현상학> 서설에 나오는 말이다. 나에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치와 같다. 나에게 익숙한 것은 나와 늘 붙어 있어서 무의식중에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 바로 그러한 사실 자체가 사태의 인식을 방해하는 주범이다. 나에게 가까이 있는 대상을 나에게서 떼어 놓고 의식하는 데에서 대상에 대한 참된 인식이 생겨난다. 사진작가 고원재는 자신의 작업 현장에서 이미 항상 동행하여 자신에게 충분히 익숙하고 당연한 ‘강철판’이라는 대상에 주변의 일상에서 찾은 조미재료를 뿌린 뒤 그 결과를 촬영하여 사진 이미지의 새로운 영역을 선보인다. 4 년여에 걸친 노고 끝에 빛나는 결정체들을 관객들은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저녁 무렵 고원재는 강철판에 식초, 식용유, 소금, 설탕을 개별적 혹은 동시적으로 뿌린 뒤 다음날 새벽녘에 촬영을 시도하였다. 녹이 슨 강철판(Fe3C)은 습기와 온도와 바람의 영향 아래에서 조미재료들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전혀 예상치 않은 현란한 형태와 색채를 연출한다. 인간이 먹는 것을 철판이 먹은 결과는 기상천외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소금, 식용유, 식초, 설탕 가운데 소금만 무기물이고 나머지는 유기물이다. 흥미롭게도 무기물인 강철(녹 포함)에 무기물인 소금이 작용하면 붉고 균질(均質)적인 영상이 나타나는 반면, 유기물인 식초, 식용유, 설탕이 작용하면 푸르고 비균질적인 영상이 나타난다. 동질(同質)의 족속끼리는 화해의 양상을 띠고, 이질(異質)의 족속끼리는 배반의 양상을 띠는 데에서 비롯한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가운데 기괴하고 음산한 사진들은 식초와 식용유의 작용 결과이다. 조미재료를 뿌리지 않고 철판 그 자체를 찍은 사진도 여럿인데, 이 경우의 이미지는 당시의 기상에 영향을 받은 철판 자체의 자연적인 속성이 드러난 효과이다.
소금의 균질적인 효과 그리고 식용유와 식초의 비균질적인 효과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형상들은 ‘우연적인 효과의 미학’이라 부를 수 있다. 화학반응의 효과는 예상할 수 없다. 물질의 반응은 인간의 의지 밖의 사안이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사진만큼 우연과 행운에 의존하는 분야는 없다. 작업주체의 의지를 벗어나 자연의 효과에 의존하는 정도가 클수록 예술성과 작품성은 하락하기 마련이다.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자연미를 배제하고 인간의 손을 거친 예술작품만을 미학의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이번 전시 <엘랑 비탈>의 경우 자연적인 화학반응은 우연이지만 강철판과 조미재료의 주체적인 융합 그리고 촬영의 시간과 조건의인위적인 선택 등이 작품의 예술성에 개입하는 셈이다.
“우연만이 메시지로서 가치를 지닌다.”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말이다. 우연은 개인의 의지 밖에서 일어나는 사태이다. 강철판과 조미재료가 만나게 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물리적인 현상은 예측을 불허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생명 출현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유리(Urey)와 밀러(Miller)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만들어내는 실험을 시도한 결과에 비견될 수 있다. 여기서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손(E. Bergson)이 <창조적 진화>에서 설파한 ‘생명의 도약(Élan Vital)’을 고원재의 이번 사진작업을 해석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생명의 진행을 ‘생명의 원초적인 약동’에서 찾으면서 이렇게 서술한다. “이 작용의 방향은 아마도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생명이 진화하면서 자신의 행로에 심어 놓은 예측 불가능한 형태들의 다양성은 바로 거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작용은 언제나 다소간 높은 정도의 우연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적어도 선택의 흔적을 내포한다. 그런데 선택은 몇몇 가능한 행동들을 예상하는 표상을 전제한다. 따라서 생명체가 행동하기 전에 행동의 가능성들이 그려져야 한다.”
우연과 의지의 결합체인 사진예술에서 고원재의 이번 전시 <엘랑 비탈>은 이전의 소나무나 바위 사진에 비해 훨씬 더 사진의 우연적 효과에 의존하고 있다. 그만큼 이번 전시의 이미지들은 더욱 파격적이고 신선하다. 우연의 효과에 의존하는 정도가 큰 만큼 거기에서 비롯하는 이미지들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강도가 더 크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적 효과들은 강철판 자체의 내적인 성질이 조미재료에 의해 외부로 표출된 결과이기도 하다. 쇠(鐵)에 식초, 식용유, 소금, 설탕이 가미되면서 쇠에 감춰져 있던 내밀한 속살이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쇠는 소금을 만나 균일한 형태를 드러내고, 식용유를 만나 우아한 곡선을 선보이며, 식초를 만나 파편적이고 폭발적인 형태를 드러내고, 설탕을 만나 생물을 끌어들인다. 철의 대지는 조미재료의 물질과 관계하여 다양하고 다변적인 원시의 형태와 색채를 뿜어내어 관객을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1. 우주의 생성 2. 생성의 속도 3. 대륙의 생성 4. 동물의 형상 5. 수려한 영상의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블랙홀, 폭발, 분출, 연금술 등 존재 자체가 생성 당시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다. 2. 폭풍우, 베르누이 정리, 바람귀신, 휘날리는 밀밭, 고흐의 현란한 곡선 등 생성에 수반하는 속도감과 공포감을 자아낸다. 3. 지구의 대륙이 형성되는 과정이 형상화되어 카오스 형태의 해안, 대륙붕의 이동, 인도의 지형, 보스포루스 해협 등의 이미지가 연출되고 있다. 4. 기괴한 생물/동물의 형상으로서, 아메바와 유충과 성충의 형상, 질주하는 사티로스, 노래하는 아귀들, 폭발하는 악귀, 강아지, 사슴, 늑대와 아이 등 원초적인 생명체와 신화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5. (이 부류는 강철판에 아무런 조치를 가하지 않은 경우로서) 폼페이의 축제, 교황청의 비밀, 황실의 동창(凍窓), 열반(Nirvana)의 형상을 보여준다.
고원재의 이번 전시작품들은 우주의 탄생과 지구의 형성 과정 그리고 생명의 출현을 연상시키는 기묘한 현상들로 관객의 눈을 현혹시킨다. 베르그손이 말한 도약적인 생명현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어 기괴한 형상을 띠고 있는데, 이들 이미지 앞에서 관객은 공포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황홀감을 느끼기도 한다. 생명의 원초적인 운동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파악한 니체에 따르면, 전체와 개체가 한데 어울리는 디오니소스적인 율동은 무아(無我)의 황홀경(ecstasis)을 유발하지만 그 배후에는 항상 카오스적인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양상은 혼탁하고 복합적이며 광(狂)적이다. 물질과 생명이 출현하는 현장은 깔끔하거나 우아하거나 순수하지 않고, 거칠고 추악하며 음산하고 혼탁한 모습을 보인다. 생명은 복합적이고 음습한 곳에서 피어난다. 이곳은 거친 야생의 원형을 유지하여 존재적으로 복잡하고, 도덕적으로 사악한 형상을 하고 있다. 탁하고 거친 곳에서 미생물이 생겨나듯이, 생명의 창조성에도 야생적인 활동성과 디오니소스적인 사악함이 뒤따른다.
영국의 소설가 몸(S. Maugham)은 <달과 6펜스>에서 그가 모델로 한 인물인 인상파 화가 폴 고갱(소설 속의 인물 스트릭랜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는 야성적인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스트로브)도 아마 나처럼 그에게서, 물질이 대지와 맺었던 최초의 관계를 잃지 않고 그 자체의 혼을 아직 지니고 있던 때, 그러니까 역사 초창기의 야성적 존재를 연상시키는 어떤 사악한 요소를 그에게서 느꼈는지 모른다.” 고갱은 자신을 닮은 타히티의 원시적 자연과 인간을 사랑했다. 고갱의 투박하고 거친 태도는 일반적인 도덕을 넘어서는 사악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생명의 원초적인 상태는 고갱의 야성적인 행태와 유비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생명의 발생과정에서, 탄생의 결과는 깔끔할 수 있으나 그 과정은 항상 복잡하고 칙칙하다. 고원재의 작품에서 주로 보이는 파괴적이고 야생적이며 섬뜩한 이미지들은 생명이 출현하는 데 따른 원초적인 양상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고원재는 주변의 강철판과 조미재료의 우연적인 조우에 착안(着眼)하여 물리적으로는 약동하는 생명의 원초적인 활동을 시각화하고, 심미적으로는 인간의 상상력을 무한히 자극하는 현실적 혹은 허구적 이미지들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