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한국사진방송] 김재완 기자 =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방위사업청에서 평생을 바친 권영애 서기관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열리는 뜻깊은 전시회 RETROSPECTION - 回想 展이 2021년 3월 24부터 3월 28일까지 아라갤러리(과천시민회관 2층)에서 개막될 예정이다.
권 영 애 (방위사업청 서기관 - 공로연수 중)
정년퇴직을 앞둔 공무원에게 주어지는 공로연수 기간은 퇴직 후의 인생 재설계를 위한 준비 기간이다. 은퇴는 ‘하나의 사회적 역할에서 다른 사회적 역할로 이동하는 것’이라는 백과사전의 설명처럼 조직의 범위 내에서 이어지던 일상을 개인으로 이동하면서 공적 책임감을 내려놓고 오로지 나로서 살아야 하는 종류가 다른 삶의 책임과 마주했다. 공직생활을 좀 더 의미있게 마감하고 퇴직 후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작을 스스로에게 약속하고 싶어 전시회를 기획하게 됐다.
방위사업청에서 무기체계의 연구개발 및 획득이라는 국가적 사업 담당 시의 업무자세는 가장 먼저 ‘국익에 기여하는가’였고 판단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할 때는 ‘어느 쪽이 국익에 우선하는가’였다. 작가의 길을 가겠다는 결심을 하며 그림은 어떤 자세로 그릴까를 생각했다. 최종적으로 ‘내가 소장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자’였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예술의 세계는 끝이 없겠지만 하나의 작품을 끝낸 시점에서는 누구 앞에서도 최선을 다했다는 마음으로 가벼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자라는 다짐을 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 관람 중 만난 깊은 색감에 매료되어 직장을 다니면서 틈을 내 그리곤 하던 유화를 잠시 접어두고 옻칠회화를 시작했다. 시작의 호기로움과 함께 재료의 확장에 따른 미술 영역의 범위를 크게 활용한다는 자긍심이 있었으나 뒤따르는 버거움 또한 컸다.
옻칠의 여러 장점(내염성, 내열성 및 방수, 방충, 방부, 절연, 뛰어난 부착력 등)에 반하여 작업 시 온도, 습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재료의 특성상 애를 먹기 일쑤였다. 원하는 색감으로 칠하고 하루를 지나고 나면 의도하지 않은 색으로 변해 버리는 상태를 수없이 번복하며 안료와 옻칠과의 성질을 알아가는 시행착오의 과정뿐만 아니라 체질 알레르기에 노출되어 병원 신세를 지는 심한 고통을 겪기도 했다. 가려움과 부풀어 오른 피부를 감당하지 못해 어느 순간 전시회를 중단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회의에 빠진 적도 있었다. 몇 번의 숨 막히는 장벽에 부딪히면서도 여기까지 온 것은 이번 전시가 작품을 발표하는 개인전의 의미 외에도 내 삶의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더 포함하고 있기에 특유의 책임감까지 작용 되어서 가능했다.
유년 시절 산골 마을에서 자랐다. 주변은 온통 자연이었다. 한지(韓紙) 한 장의 문을 열면 앞마당이었고 또 뒤뜰이었다. 철마다 햇살은 길게, 짧게 처마 깊숙이 또는 얕으막하게 들고 나고가 자유로웠다. 그곳의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바꿔 비를 내리고 눈을 내리고 바람을 데리고 구름을 띄워 왔다 가고를 소리 없이 순환했다. 엄만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부르셨다. 그러나 친가나 시댁이나 가부장적이기만 했으니 빼어난 노래 실력을 드러내고 살지 못하셨다.
심금(心琴)을 울리던 꺽어 넘던 목소리의 곱디고왔던 여인, 어찌 엄마이기만 했으랴. 농번기 마을잔치 중 노래자랑 때가 되면 천막무대에 올라 그 깊은 가슴속 한을 끌어내 하늘을 치솟아 오르게 했으나 누구 하나 아는 체하는 이 없었던 깊게 묵은 시간, 서리서리 돌아 구비지는 가락을 일년에 한번 있을까말까한 천막무대 노래자랑에서 어찌 다 풀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양 시어른 모시기와 농사일과 할머니가 계시는 동안은 삼베까지 짜셨던 노동의 사명을 타고 나신 듯했던 삶. 그 인내의 한계에서 엄마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넌 나처럼 살지 말아라”라는 당부를 내뱉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사일 안 시키고 책을 읽게 하시던 엄마의 교육 탓에 자식놈은 시골의 정서를 아름다움으로 기억하게 해주셨지만 어른이 되면서 내 삶은 오로지 엄마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엄마 목소리에 철없이 흥을 실어 즐기던 아이가 이 나이 되어 산자락 메아리로 묻힌, 못다 펼친 엄마의 소리를 노래가락을 대신한 붓질의 신명으로 불러오고 싶었다. 엄마가 걸어간 고대의 숲길에서 원시의 울림을 듣는다. 그곳은 한없는 고요가 있고 태초의 야생성으로부터 느껴지는 강한 생명력이 숨 쉬고 있기도 하다.
태양과 같이 깨고 달과 같이 잠들기를 반복하여 수십 번을 넘어 닿은 내가 선 이곳, 모든 게 더딘 산골 소녀가 여인이 되고 어른이 되기에는 남들보다 한 모퉁이만큼의 햇살이 더 필요했다. 충실한 과육으로 익어가는 저마다의 과실처럼 고유의 삶을 채우기 위해 정수리 내리쬐는 뜨거운 직광(直光)에 살갗을 태웠다. 그 을은 피부엔 세월의 주름과 반점 남겼지만 내 안에 여지껏 남아있는 엄마의 소리를 태초의 화음(和音)으로 다시 만난다.
깊숙한 가슴으로부터 생명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탄성 끌어 올려 옻칠 회화와 마주했다. 마크로스코의 대형 색면화 앞에서 명상에 젖었고 윤형근 화백의 엄버블루(Umber Blue) 색감 앞에서 한없이 고요로 왔던 느낌을 옻칠의 천연색으로 만나던 희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뛰는 일이다. 그렇게 발견한 자연의 색 위에 엄마의 목소리를 스미게 하고 맨다리 드러나는 노동의 인내와 원시의 야생성을 더했다. 한길 우물의 두레박 당겨 올리던 팔 근육의 신성(神聖)은 사포치는 모습에 겹을 놓고 희생을 책임으로 수용하던 인고(忍苦)의 시간은 겹치고 겹쳐 쌓고 또 쌓는 옻칠작업에 빛으로 더했다.
옻칠, 그 신비의 색으로 본연(本然)의 흔적을 다시 창조한다. 심연(深淵)을 만난다. 내 고향은 댐공사로 인해 수몰되었다. 물에 잠긴 마을이 그리운 줄 알았다. 이제 그곳에 함께 잠긴 엄마가 큰 덩이의 그리움인 것을 안다. 길고 깊은 숲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는 그 시절이 나에겐 태초이고 고대이고 원시이고 야생이고 엄마의 가슴팍이다. 감아두었던 실타래를 푸는 마음으로 그림판 마주하고 섰을 때 환하게 피어나는 엄마의 박꽃 같은 미소를 만났다.
분홍빛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여린 몸의 고운 모습이셨으면서 희생과 인내로 꽉 찬 삶 전체를 온몸으로 진두지휘하는 여장부이기도 했고 자식에겐 여자만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일깨우고자 농사일보다 책을 읽게 하셨던 고마우신 엄마와 언제나 내 삶의 모든 것을 인정해주시고 국방일하는 맏자식을 자랑스러워하셨던 아버지에게 이 전시를 바친다. 앞으로 삶의 모든 아름다움에 관심을 두고 그 핵심을 뽑아 작품에 담을 생각이다. 폭넓은 시선의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보고 듣고 쓰고 그리며 살 것이다. 칸딘스키의 그림에서 노래가 들리듯이 내 그림도 보는 이들 저마다의 시(詩)가 되고 음악(音樂)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