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영 시집 <황금모피를 찾아서> 출간
실크로드의 나그네가 되어 그 발자취를 기록한 생생한 기행시집
오세영 시인이 다시 <황금 모피를 찾아서>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 임한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은 1968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이래 <반란하는 빛> 외 25권의 시집, <한국낭만주의시 연구> 외 23권의 학술서, <사랑에 지친 사람아 마음에 지친 사람아> 외 4권의 산문집을 펴낸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이다.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만해대상(문학부문), 시인협회상, 김삿갓문학상, 공초문학상, 녹원문학상, 편운문학상, 불교문학상, 고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늙은 노새 한 마리를 타고,
늙은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위태위태
온종일 계곡을 기어올라
나 여기에 이르렀다.
차마객잔,
옥룡설산을 마주보는 대협곡, 합파산
비탈길 28굽이를 돌아
저물녘에 들어서야 비로소 힘겹게 몸을 푼
호도협 해발 2,860m의 수직
벼랑 끝.
발 아래 별이 뜨고, 발 아래 별이 지는 곳.
여창旅窓에 기대어 쩔렁쩔렁
바람에 실려 오는 마방의 워낭소리를
듣는다.
문풍지 우는 소리를 듣는다.
서천서역西天西域 머나먼 인생의 길.
진사강을 건너 매리설산을 넘어 내일은 또
얼마를 걸어가야 할거나.
터벅터벅
늙은 노새 한 마리를 타고,
절뚝절뚝
늙은 노새 한 마리를 끌고.
시 <차마고도> 전문
오세영 시집 <황금 모피를 찾아서>는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 Indiana Jones>를 보는 느낌이다. 시집 제목부터가 ‘잃어버린 크리스탈 왕국을 찾아서’처럼 신비스럽다. 지구상의 땅이지만 결코 쉽게 갈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를 찾아 무턱대고 배낭을 메고 떠나곤 하는 오세영 탐험가(?)가 발로 쓰고 가슴으로 찍은 기록이다.
오세영 시인은 저명한 대학교수, 학자, 시인이면서도 미지의 세계를 거침없이 휘젖고 다니는 여행자이기도 하다. 아니, 여행자라기보다는 탐험가에 가깝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건너 파미르고원까지 이르는 대장정을 하기도 하고, 미국, 캐나다, 일본, 싱가포르, 대만, 이스라엘, 유럽 대부분 국가 등 선진국은 물론, 체코, 네팔, 몽골, 카자흐스탄, 터키, 이란, 티베트, 중국 차마고도, 인도, 파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아르메니아,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베트남, 몰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전 세계 오지를 찾아다녔다. 한 달간의 한 달간의 아프리카(케냐, 탄자니아, 짐바브웨, 잠비아, 니미비아, 남아공, 보츠나와 등), 또 40일간의 남아메리카 (멕시코, 쿠바,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오지여행에 이르기 까지.
필자는 우연한 기회에 2012년 오세영 시인과 동행으로 7박8일간 중국 운남성 홍토지, 샹그릴라, 려강고성, 대리고성 등을 비롯, 차마고도의 하일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세계 3대 트레킹 코스 중 하나인 호도협 트레킹 28굽이길(정상 해발 2,670m)을 넘었고, 만년설산인 옥룡설산(해발 5,596m)을 3,800m까지 함께 올랐던 적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이 다시 큰 설렘으로 다가온다.
시가체에서
라체, 안바춘 지나
간신히 갸솔라 패스를 넘었는데
갑자기 하늘하늘
꽃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 하늘에서 나를 보고 손짓하시는
70여 년 전의 어머니.
초등학교 1학년 하교 시간
소복을 하신 채
창밖 운동장의 목련꽃 그늘 아래서
나를 기다리시던 꼭 그때 그 모습이다.
아가, 예서 그만 돌아가거라. 오지 마라.
어머니,
나는 전신으로 하늘을 날려다 그만
발을 헛딛고
정신을 잃었다.
어디선가 아스라이 들리는
독경소리, 목탁소리, 덜컹거리는
지프의 차 바퀴 소리.
생사를 가르는 히말라야 해발 5,520m의 능선,
갸솔라 패스의 한 외딴 마을, 팅그리에서
산소통을 입에 물고 깨어난
그 인생의 길.
나는 나비가 아니었다.
시 <히말라야를 넘다가> 전문
갸솔라 패스는 히말라야를 넘는 우정공로에서 가장 높은 고개. 해발 5,220m이다. 오세영 시인은 2006년 초가을, 공로 318번 길을 따라 지프로 라싸에서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의 카트만두로 가던 중 갸솔라 패스에서 그만 고산병으로 쓰러져 생사를 오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갸솔라 패스의 한 외딴마을 해발 4,390m의 팅그리 Old Tinggri 마을로 후송되어 가까스로 생명을 구했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그는 결국 시 말미에서 ‘나는 나비가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네 일생의 소원이 무엇이냐.
속인은 일러 혹
돈을 버는 일이라 하고 혹,
권력을 쥐는 일이라 하고 혹,
절세의 미녀와 일생을
함께 사는 일이라 하더라만
이도 저도 다 틀렸다 오직
절대 자유에 드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더라.
내 우직한 판단에도 그럴 법해 보이나니
돈에 구속당하고,
권력에 구속당하고,
미녀에 구속당해 살기보다 차라리
이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해서 무애자재하게
살 수만 있다면 그 어찌
행복하다 하지 않겠는가.
시 <둔황석굴> 일부
이 시의 주석에 의하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곳도 바로 세계 최대 석굴사원인 ‘둔황석굴’이다.
오민석 평론가(단국대 교수)는 서평에서 “고대 불교의 철학과 예술과 정치, 사회의 다양한 정보가 숨겨져 있는 이 장소에서 화자가 읽어내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떠나 장구長久하게 유통되는 ‘공통의’ 진리다. 먼 고대에 ‘절대 자유에 드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석가세존의 주장과, ‘무애자재하게’사는 것이 가장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화자의 생각은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명백한 ‘공분모’를 가지고 있다. 오세영 시인이 여행을 통해 읽어내는 것은 무엇보다도 ‘초超 시간적인 진리들’이다. 유구한 세월이 지나도 진리 내용이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간의 덧없음, 세월의 허망을 반추하는 행위다.”라고 풀이한다.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
바람의 마을.
잔잔해진 카스피의 파도를 바라보며
막 지나간 사막의 모래폭풍을 생각한다.
역사상
알렉산더가, 징기스칸이, 마미르 티무르가
아니 오스만이
실은
사막에 몰아닥친 폭풍이 아니었더나.
날씨가 개니 모두 한바탕 장난이었다.
바람이 친 한바탕 역사의
우스개 장난이었다.
시 <카스피해에서> 일부
오민석 평론가는 “‘바람’과 ‘폭풍’은 순간적 현실이지만, 영원한 현실은 ‘날씨가 개인 다음’에 드러난다. 실크로드는 인류가 서로 없는 것을 구하고,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교제’의 공간이다. 그 교제를 통해 인류는 서로의 안으로 스며 들어갔다. 오세영 시인은 단독자로서 실크로드의 시간과 공간을 횡단하면서 장소들 안에 얼룩진 무수한 ‘지문地文’들을 한 장 한 장 넘긴다. 그것의 기록이 이 시집이다. 인류여, 우리는 서로 같으니 서로 환대하라. 그것이 오세영 시인의 전언傳言이다”라고 말한다.
불타는 땅 타클라마칸을 건너
칼 바위산 초르타크를 넘어
얼음산 무스타거를 올라
마침내 나, 파미르에 섰다.
해발 6,500피트,
위에서 굽어보는 세상은 어지럽기만 하다.
현기증과 두통과 무기력으로 지샌
고원의 하룻밤은 고달팠지만
실상 나는 뱃멀미에 시달리고 있었노라.
아, 파미르
거대한 시간의 호수.
예서 더 흐를 수 없는 시간의 쪽배에 앉아
내 지금 찰랑거리는 수면을 들여다보나니
과거, 현재, 미라라는 것이 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이뇨.
일찍이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가
백만대군을 거느리고 개선했던 고성, 스토우청
그 폐허에 핀 봉숭아 꽃잎이
눈물겹고나.
시 <아아, 파미르> 전문
오세영 시인은 초기에는 아방가르드적 경향의 모더니즘 시 창작에 심취했다. 그러나 곧 그 한계성을 깨닫고 한동안 언어실험과 사상성의 접목을 고민하던 중 세 번째 시집 <무명연시(無明戀詩)>를 쓰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만나 이를 계기로 불교존재론이라는 토대 위에 미학과 철학을 결합시킨 그 나름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여 한국현대시사에서 ‘철학적 서정시’라고 불릴만한 새로운 시의 지평을 열었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가 추구한 시적 지향은 한마디로 현대문명의 위기극복에 동양의 예지가 어떤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는데, 이같은 그의 지적(知的) 노력은 국제적으로도 인정을 받아 2016년, 영어로 번역된 그의 열아홉번째 시집 <밤하늘의 바둑판 Night Sky Checkerboard>이 미국의 <시카고 서평 Chicago Review of Books>에 의해 ‘2016년 전 미국 최고 시집 The Best Poetry Books of 2016’ 열두권 중의 하나로 선정되는 결실을 거두기도 했다.
내 오늘로 알았다.
새벽 하늘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가
왜 그렇게 밝고 맑게 빛나는지를...
천상에서 가장 가까운 호수 이식쿨에 내려
밤마다 몸을 씻고 돌아와서 그렇지
아니하더냐.
겨울에도 춥지않게 항상
데워두어야 할 별들의 목욕물.
내 오늘 밤, ‘샛별의 아버지’라 불리는
촐폰 아타 호반에 숨어 가만히 엿보고 있나니
하늘에서 스스럼없이 내린 별 하나가
아이벡스, 아르갈리, 붉은 사슴, 눈표범, 야생마...
암각화에 잠든 짐승들을 하나하나
호명해서 깨웠더니
희희낙락 물장구를 치고 있구나.
하늘의 호수 이식쿨에서는 별들도 이처럼
장난을 칠 줄 아는구나.
*이식쿨 Issyk-Kul : 키리기스스탄 동북부 해발 1,609m의 고지에 위치한 호수. 동서 177km, 남북 57km, 총면적 6,292㎢로 세계에서 바이칼호에 이어 두 번째 넓은 호수다.
시 <이식쿨호수에서> 전문
오세영 시인은 시집 머리말에서 “사람들은 묻는다. 왜 고생을 일부러 사서 하느냐. 그러나 내게 있어 여행은 고생이 아니다. 오히려 기쁨이며, 놀라움이며, 충족이며, 새로움의 발견이다. 인간이란 원래 지적 호기심을 가진 동물,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 ‘본다’는 것은 곧 ‘깨우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 생은 나그네의 길, 그래서 문예학에서도 문학의 본질은 나그네의 원형상징voyage archetype에 있다고 말하지 않던가. 길이 있으므로 나는 그저 가보는 것이다. 하물며 그 길이 수만 년 전 우리 한민족을 해 돋는 동쪽으로 이동시켜, 오늘의 한반도에 정착케 한 바로 그 성스러운 실크로드임에랴”라고 술회한다.(정리/임윤식)
*펴낸곳 : ㈜문학사상 가격 13,500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