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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한정식 사진전을 개최한다.

Korea Photographers Gallery 한정석사진전
등록날짜 [ 2022년01월17일 17시01분 ]
 (한국사진방송 정태만기자) = Korea Photographers Gallery 에서
2022년 1월 19일부터 3월 3일까지 ‘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한정식 사진전을 개최한다.




한국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한정식은 ‘고요’의 미학을 완성한 사진가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한국 고유의 미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국적 사진예술’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2015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 5인에 선정되어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들을 소개하는 <한정식_고요> 전시를 2017년 개최하였다. 

이번에 ‘고요_존재는 고요하다’ 전시는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한정식 작가의 고요작품들로
존재의 본질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이야기 하였던 기존의 고요 작품들과 달리 세계를
경험하는 작가 내면의 의식을 추상의 형식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그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사진미학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다.
한정식은 그의 관념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본질을 사진적 추상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는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이 가지고 있는 주제(theme)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진이 사진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존재성을 사진 위에서 지워 사진 그 자체를
제시하여야 한다.” 라고 이야기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이일우 기획자는 서구미학에 기반한 사진예술이 우리 안에서 일반화 되어지는
모습에 대한 비판적 생각에서 이번 전시를 기획하였다고 전하며 한정식의 ‘고요’는
한국의 정신미학과 고유한 문화정체성 위에서 한국사진예술의 근간이자 토대로서 의미있는
역할들을 제시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KP 갤러리는 이번 전시를 통해 한정식 작가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 온 “고요”의 세계를 조망하고
한국의 사진예술을 대표하는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 작품미리보기 )

고요B033가평 3003,114cm*114cm


고요 F014 홍천 2008,114cm*114cm
 

고요 G070 화엄사 2010,114cm*114cm


고요 H034_1 양양 2011,114cm*114cm


고요 H036 _1 동해 2011,114cm*114cm


고요 H034_1 양양 2011,114cm*114cm

고요 I106 연천 2012,114cm*114cm






* K.P 갤러리
  Tel : 02. 706. 6751 / Adress :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435-1 B1
 
 
■ 전시소개 
 
공상(空像, 空相),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글 : 최연하(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한정식 작가는 사진 자체가 진리(본질)가 아니라, 사진이 진리를 드러나게 하고,
진리에 이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진리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사진 교육자이자 작가로서 사진을 대할 때 엄중하고 엄격한 절차를 중시하고
사진이 담아야 할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려 형식과 내용이 다툼이 없는 조화로운 세계를 견지했다.
<고요>가 전시되고 사진집으로 묶여 세상에 나올 때마다,세계-대상-피사체의 동일성을 지향한 작가의 정교하고
빈틈없는, 의미로 꽉 찬 사진 재현은 좀체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형식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은 감각과 지성이 교차하고 선명하게 흔들린 멈춤,
혹은 구체적인 상 속의 떨림 같은 비의(秘意)적인 자유가 흐른다. 무엇일까. 이 내밀한 이미지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데, 그 무엇도 아닌 ‘어떤 것’이 ‘있는’ 사진.
한정식 작가의 미발표작에는 그러한 것들이 (고요 속에서) 소란스럽게 생성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바로 공(空)이었다.
한정식 작가의 사진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이것은 공(空)이다! 이 텅 빈 이미지는, 놀랍게도 작가가
그동안 발표했던 ‘고요’ 시리즈를 촬영한 필름 곳곳에, 사이에, 끝에 아무렇지 않게 그냥 있었고,
어떤 연유에선지 세상에 전시될 선택권을 놓친(받지 못한) 사진이다.
이 사진 옆과 위와 아래…에 있던 사진들은 밖으로 나와 자신이 작품임을 입증하고 있었다면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은 오랜 시간 빛을 머금고만 있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그때 그곳의 빛을 기억하며, 사진의 시공 속에 고요히 머물렀다. 선택받지 못한 필름들이 선택된 필름 사이에 있었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면 한정식 작가는 사진의 대상성을 주목해 온전한 형식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도중에 무엇도 아닌, 이름 붙일 수 없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들은 서로 연결 되어 있었고, ‘A’컷을 찍었기에 ‘a’컷이 탄생 될 수 있었다. 상(像)이 선명한 컷과 상(像)이 흐릿하거나 지워진 컷은 공존해야 하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당연히 한정식 작가의 기발표작이 사진의 본질에 닿으려는 욕망에 충실했다면, 선택 받지 못한 이 사진들은 ‘고요’의 의미도 모르고 다만 정적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을 찍은 채 숨 쉬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이번 전시는 한정식 작가의 세계-내-이미지, 공상(空像, 空相)이 드러나는 전시라고 생각한다. 한정식 작가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이미지들은 텅 빔 속에서 탄생하거나 텅 빔의 작용을 통해 이뤄진 사진이다. 
 
필자가 명명한 ‘세계-내-이미지’와 ‘공상(空像, 空相)’은 한정식 작가의 작업 세계의 근간을 이룬 불교의 연기설에서 영향을 받은 말이다. 세계 내 모든 존재는 상호 관계에 의해 의미 지어지거나 의미가 지워지고, 존재는 세계 속의 인연(因緣)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는 것이 연기설의 요지이다. 다양한 존재가 다기하고 다채롭게 움직이다 인연이 되어 만나고 흩어지는 것.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중요해진다.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즉, 학습 받은 데로 보는 것이 아닌, 대상이 드러낸 본무자성(本無自性)을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처는 공(空)으로, 노자는 도(道)라고 일컬었다. 텅 비어 있는 것 같은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이 ‘공상(空像)’이고, 모든 상(像, image)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나고 이루어지는 것이 ‘공상(空相, co-existence)이다. 모두 세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현현(顯顯)하는 것이다. 한정식 작가의 강렬한 흐릿함과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움직이거나 적막을 이루는 이 이미지들은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에 대한 메타포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모두 공(空)에서 비롯되고 공(空)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부연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의 작용, 학습된 시각, 경험의 정도…에 따라 사진 속에 찍힌 대상이 모두 다르게 보일 것이고, 사진 작품과 관객이 맺는 관계에 따라 감상의 정도도 제각각이라는 것. 그래서 한정식 작가의 사진 속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게’ 된 것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하는 이미지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지만, 무엇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이 사진들은 카메라의 광학적 작용과 그곳에 있었던 대상, 공간의 상호침투로 만들어낸 이미지다. 미술사적으로 접근하면 추상(抽象)이라 하겠지만, 단순히 상이 있고 없고(有無)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노자가 이 이미지를 본다면 유무상생(有無相生) 이미지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구상과 추상을, 단어 그대로 풀이하면, 구상(具象)은 상(象)을 갖추는(具) 것이고 추상(抽象)은 여러 부분 중에 하나를 뽑아낸(抽) 낸 상(象)이다. 구상은 추상을 포함하기도 하고 때로 추상이 구상이 될 수도 있는, 둘은 사실 한 몸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개 구체적인 상이 보이지 않거나, 구상의 반대 항에 추상을 놓지만, 이항 대립적으로 둘을 해석하려고 할 때 언어 프레임에 갇히는 형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별개일 수 있으나 존재론적으로 둘은 서로 의지, 보충, 보완하며 존재한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말과 침묵, 양달과 응달, 빛과 그림자, 흑과 백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는 이미지. 한정식 작가의 텅 빈 이미지는 ‘모든 것의 이미지’로 관객과 함께 공상(空相)하고 공생(共生)하며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는 사진이다. 
 
한정식 작가는 본인의 논문 <추상사진에 관한 연구>(1991)에서 사진의 추상성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사물이 사물로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선이나 면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든지, 사건이 사건으로 사회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을 떠나 비현실적 상황을 창출하는 경우에 추상 사진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 형태로 재현되어 있다해도, 그것이 구체적 현실의 재현에 목적을 두지 않는 경우, 대상이 그 현실적 의미를 벗어나, 현실도 단순한 형태도 아닌, 제3의 의미로 전이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일러 본고에서는 추상 사진이라고 지칭하였다. 즉, 그들 영상이 언어로는 표현 불가능한 어떤 상황, 다시 말해서 ‘언어 밖의 세계’를 시각화해 제시하는 경우 등을 추상 사진의 대표적 경우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제3의 의미’, ‘언어 밖의 세계’는 벤야민의 문지방 영역 혹은 제3의 공간, 바르트의 푼크툼 혹은 무딘 의미, 둥근 의미가 연상되는 비유이다. 모두 말 할 수 없는 것과 찍을 수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과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은유이고, 그 세계를 사진으로 촬영하면 한정식 작가의 언급처럼 추상 사진이라 할 수 있다. 한정식 작가는 오래전부터 추상 사진을 통해 사진의 한계와 한계 너머의 세계를 동시에 타진했다.
아마도 이번 전시는 작가의 사진 실험과 사진 수행을 새롭게 조명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최연하(독립큐레이터, 사진평론가)
 
 
 
 
 
 <연보>

 

19373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 84번지에서 아버지 한 용원(韓鏞元)과 어머니 문 정숙(文貞淑) 사이에서 태어나다.
내 위로 형 셋이 있었다 하나 모두 어려서 잃고 아버지 나이 오십에 겨우 나 하나를 건져 키우셨다. 나를 낳으며
돌림자도 순박할 순
()자에서 맑을 식()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1942년 내자동 종교 교회 부설 갑자 유치원에 들어가다.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도 아니었 건만 유치원까지 보낸 것은 오십에 겨우 하나 건진
          외아들이 너무 귀여워서가 아니 었을까 싶다
. ( 1. 유치원 졸업사진)

1943년 동 유치원 졸업 후 필운동의 매동 초등학교입학하다.

1945년 일제 패망을 두 달 앞두고 아버지 58 세로 돌아가시며 이 때부터 생활 능력도 없으 셨던 우리 어머니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1949년 매동 초등학교 졸업, ‘서울 상업중학교’(지금의 청운 중학교’)에 입학하다

19506. 25 남침으로 한국전쟁 발발하며 그 해 12월에 부산으로 피난하다. 나는 피난할 형 편도 못 되었지만 종조부모님의 돌보심을 받아
          피난 생활은 물론 학교까지도 제대로 다닐 수 있었다
. 대학 졸업 후 자립할 때까지 종조부모님의 보살피심을 받은 바, 이 분들의 은덕은
          친부모 못지 않았다
. 전쟁 중이던 10월 경 헌 공책 뜯어 바느질로 꿰매어 일기를 쓰기 시작하다. 일기 쓰기가 오늘의 나를 이룬
         가장 큰 계기로
,일기는 지금도 계속 쓰고 있다.

1952년 교육제도가 바뀌어 중학교가 고등학교와 분리되어 서울 상업중학교청운 중학교로 바뀌면서 피난처 부산에서 제1회로 졸업한 후,
          역시 피난 온 서울 사범학교’(지금 의 서울 교육대학교전신)로 진학하다.

1955년 동 사범학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과에 입학하다.

195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가작으로 입선이 되다. 소설가가 어려서부터의 꿈이 었지만 소설은 한 편도 못 써보고 시를 쓰게 된 것.
          그러나 시로서도 성공을 거 두지는 못하였으나, 사건역시 내 일기쓰기와 함께 오늘의 나를 형성시켜 준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2. 당시 신문 사진)

1958년 동 대학 3대 문학회장이 되어 당시 대학가 유행이었던 문학의 밤’ 2회 째 행사를 치르다.

1959년 동 대학 졸업, ‘문리사범대학부설 문리고등학교’(명지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

19602월 군 입대. 논산 훈련소 수료 후 대전 병참학교에서 교육 받던 중 4.19 혁명이 일 어나다. 외출 금지로 철조망 안에서 지내던 때,
          동아일보 이 명동 기자의 경무대(지 금의 청와대)앞 발포 사건의 생생한 현장 사진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19612, ‘교직 보유병으로 만기 제대. 4강남 중학교교사로 부임하다.

          같은 해에 5. 16 군사혁명이 일어난 후 동 6보성 중고등학교교사로 부임하 다. 여기에서 학부모 대신 찾아온 담임 학생의 누이 승 수연           
          과 인연이 맺어져 지금
껏 평생을 함께 하고 있다. (98. 64년 봉은사에서)

               ( 97. 보성 중고교 사진반 촬영대회에서. 당시, 내가 사진가가 될 것은 짐작도 못했다.)

1965530, 승 수연과 혼인을 한 후, 전 해에 마련한 미아동 국민 주택에서 어머니 모시고 신혼살림을 시작하다.
               (3. 미아리 나의 집 부근에서, 4. 신혼여행 때, 워커힐에서)

1966년 장남 계영출산.

1968년 홍 순태 선생이 조직한 아마추어 사진 동아리 백영회가입,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 작하다. 당시 지도 위원이셨던 임 응식 선생의 지도로
           올바른 사진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

1969년 차남 계륜출산.

1969년 동아일보 주최 제 7동아 사진콘테스트가작을 수상하여 동아일보사 사진동우회회원이 되다.

1970년 동아일보 주최 제 8동아 사진콘테스트준특선 수상. 당시, 임 응식 선생을 모 시고 홍 순태, 김 생수, , 등이 매주 일요일이면
          촬영을 나서기도 했다
. (100. 촬영 행각 중 경기도 장흥 계곡에서, 김 생수 촬영)

            ‘보성 중고등학교를 사직하고 EMI 학원 강사로 나서다.

1972년 동아일보사 사진동우회원전 최우수 작가상수상하며 이 작품이 종합 월간지 신동 아동년 8월호에 게재되다. 같은 해에
          한국 사진협회 회원전
‘10걸상도 수상하다.

1973년 학원 생활을 접고 휘문 고등학교교사로 부임하다. 이 해 4, 둘째 아들 계륜이 집 부근에서 대형 트럭에 치이어 중상을 입고
          서울대학교 병원에
6개월간 입원하면 서 그 6개월간을 아내가 아이와 함께 병원 생활을 하다. (5. 계륜이 퇴원 직후의 모습)

19743계림출산하다. 딸을 처음부터 원했으나 내 팔자에는 딸이 없다더라고 아내가 달래는 바람에 원하던 딸은 하나도 얻지 못하고
          아들 셋으로 단념하다
. (99. 78, 세 아들)

1975명지 전문대디자인과에 사진 강의를 맡다. 이는 오로지 육 명심 교수의 거의 강권 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결국 사진 교수로의 길로
          나를 이끈 계기가 되었다
. 내 사진 인생은 홍 순태, 육 명심 두 교수의 힘을 입은 바 컸다.

                (6. 1975년도 동아일보사 사진동우회원전에서-- 우로부터 이 명동 선생님, 육 명심, , 홍 순태 선생)

1976휘문 고등학교를 사임하고 일본 대학예술학부 예술 연구소의 연구생으로 입소, 사진을 전공하다. <유학>이라는 꿈도 못 꾸던 일이 갑자           
           기벌어져 당황했으나 아내 의 적극적 격려와 도움으로 노모와 아이 셋을 맡겨놓고 과감히 떠날 수 있었다
.

1977년 일본 니콘 살롱에 선발되어 동경 신주쿠 니콘 살롱에서 첫 개인전 <나무> 열다.

               (7. 나무<‘’> 엽서 사진, 전시장에서-호소에 에이코 선생과)

1978년 동경 신주쿠의 스즈키야 화랑에서 두 번째 개인전 <거울> 열다. (8. 동 엽서)

          일본대학 예술연구소 수료 후 귀국하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 강사 및 신구 전문대학 사진과 대우전임으로 부임하다.

12, 서울 공간 화랑에서 <나무> 새로 인화하여 국내 첫 개인전을 열다.

             (9. 전시장 사진 왼편부터, 임 응식, 이 명동, 정 도선, 최 민식, 유 만영, 성 두경 선생)

         이 때에 Ilford R.C. 무광택 인화지로 인화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일 체의 외제 인화지 수입이 금지되던 때였다.

         전시와 함께 사진집도 출판했으나 인쇄 실패로 폐기하다. (10. 공간화랑 개인전 엽서 사진)

197992학기, 신구 전문대학 사진과 전임강사로 부임, 822월까지 근무하다.

1981년 전국적으로 대학의 사진 관련 학과가 네 군데로 늘어나며(중앙대, 신구대, 서울 예전, 대구 대일 전문대) 사진 교수들의 협의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중앙대 유 만영 교수를 회장으로 모시고
사진교수 협의회창립, 간사로 활동하다. (11. 당시의 사진)

198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에 전임 강사로 부임, 이후 교수로 정년까지 근무하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연극영화학과 영화 이론 전공으로 입학하다

          대구시 목언 화랑개관 기념전에 초대되어 전시하다 .

1983년 유 만영 교수 서거로 최 익찬 교수를 사진교수 협의회2대 회장으로 추대하다.

          서울 한마당 갤러리개관 기념전에 초대되어 전시하다.

1984년 동대학원 졸업, 문학 석사(논문 제목, ‘사진의 시간성 연구’)학위 수위.

1985년 일본 유네스코 주최 제 10아시아 태평양 사진전심사 위촉받아 다녀오다. 이후 2001년까지 3회 심사하다.
            (12.
심사 장면, 동경 유네스코 회관)

1986년 서울 갤러리에서 <한 정식 사진전> 열다.

           나의 첫 저서사진예술개론(열화당) 출판하다. 이것은 월간사진83년부터 사진학 개론으로 2년간 연재했던 글을 퇴고하여 간행한 
           것으로 이후
30년이 넘은 지 금까지도 수십 판을 찍으며 시판되고 있는데 이는 필자 개인적으는 영광된 일일지 몰 라도 한국 사진계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 (초판 표지 사진)

1987년 젊은 사진가들을 모아 사진학회 카메라 루시다창립하다. 당시만 해도 전문적으로 사진을 하는 젊은 작가가 드물어 오 상조, 권 태균,
          이 강빈, 강 용석, 박 주석, 박 정 희 등 모두 일곱 명으로 출발. 후에 구 본창, 정 주하, 김 아타, 이용환, 이 상일, 한 옥란, 등이 합류하다.
               (14. 앞 왼편 오 상조, , 강 용석, 뒷줄 왼편 이 용환, 박 정희, 이 강빈)

1988년 사진학회 카메라 루시다의 기관지밝은방창간하다. 사진 작품 4(오 상조, 구 본창, 권 태균, 강 용석)과 논문 3(박 주석, 박 정희,
           한 정식)의 소박한 기관지였다. 이후 94, 5호까지 발간하다. (15. 밝은방 창간호 사진)

           일본 대학 사진학과의 은사로, 내가 귀국하기 전 해에 돌아가신 카나마루 시게네 선 생님의 저서사진예술예술로서의 사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다
.(해뜸)

198988년도에 독일 켈른에 유학 중인 정 주하 군 내외를 방문했다가 알게 된 클레베 시의 포토 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사진가 5인전>에 참여하다. (16. 5인전 엽서)

1990년 실패했던 첫 사진집나무(열화당) 간행하다.

           정부 파견 해외 연수 교수로 선정되어 뉴욕대학 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일 년간 연수 하면서 동시에 S.V.A. 사진학과 대학원 수업도 가끔씩
           참관하였다
. 12월에는 동 대학 원 예술학과 주최 심포지엄 예술/ 아시아/ 사진/ 서양에 주제 발표자로 선정되어
           한국 사진의 현황을 소개하다
. (96. 연수 시절 뉴욕에서, 임 응식 선생, 최 광호, 전 용종 씨}

             10월에는 애틀란타에 살고 있는 동포 사진가 김 종석 씨의 초청으로 애틀란타에서 그랜드캐년까지 그의 차로 미 대륙 횡단 촬영여행을
           하다
. 의외의 보너스였다. (17. 아틀란타의 벽화 앞에서 김 종석 씨와)

1992사진 교수 협의회를 활성화시키자는 김 영수, 이 주용 교수의 적극적 권유와 도움으 로 제 3대 회장으로 취임한 후, 명칭을 한국 사진 교육           
           학회
로 개칭, 활성화시키다.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제 4회 개인전 <> 열며 작품집간행하다.

1993한국 사진 교육학회한국 사진학회로 재개칭하다. (18. 동 사진)

            ’93 한국 현대 사진의 흐름 관점과 중재를 개최하여 참여하다. 당시 구성사진이라 부르던 이른바 만드는 사진이 곧
             ‘현대사진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자는 취지 에서 전통적 아날로그 사진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자 기획한 전시였다.

              사진과 이미지(서울 선재 미술관) 참여

1994년 해가 밝은 지 얼마 안 되던 정월 25,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신 어머니,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다.
          이분은 내게 나투신 관세음보살님이셨다고 나는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19. 79세 때의 어머니 모습)

            ‘한국 사진학회기관지아우라창간하고 임기 만료로 회장 직 퇴임하다.

             한국 사진의 흐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전에 참여하다

           중앙대 사진학과 동문회 3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 사진의 위기참여하다.

1995사진, 오늘의 위상(경주 선재 미술관) 참여하다

             우리 사진, 오늘의 정신(서울시립 미술관) 참여하다.

1996년 사진학회 카메라루시다2대 회장으로 구 본창 교수를 추대하고 퇴임하다.

          대한 직업사진가 협회가 제정한 제 2대한 사진문화상학술 부문 수상하다.

          카메라루시다 회원 초대전 참여(대전 시민회관)하다.

             ‘사진은 사진이다(삼성미술관 개관1주년 기념전) 참여하다

          현대 사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월간지사진예술에 연재했던현대사진의 이해를 모아사진의 변모라는 단행본으로 간행하다.(눈빛)

               (20. 강 운구 형이 들고 있고, 김 기찬 형이 찍다.)

1997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제 5회 개인전 <풍경론> 열며 작품집풍경론간 행하다.(눈빛)

          간행물 윤리위원회 제 2기 제1심의위원에 위촉되다.

‘98 사진 영상의 해조직위원으로 위촉되다.

1998년 사진학회 카메라루시다창립 10년 만에 회원은 그 후 20여 명으로 늘었으나 오히려 학회는 정체되어 고민 끝에 회원들의 동의를 얻어 발전             
          적 해체를 하다
. (21. 김 아타 작업실에서 찍은 회원들 사진)

           간행물 윤리위원회 제 3기 제1심의위원으로 위촉되다.

           동 윤리위원회 주최 간행물 윤리위 포럼에서 음란 여체 사진의 실태와 대책에 대한 주제를 발표하다.

1999년 간행물 윤리위원회 제 4기 제1심의위원으로 위촉되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장으로 취임하다.

              ‘시간의 선분(서남 미술관) 참여하다.

            프랑스 빠리 카메라 옵스쿠러갤러리의 초대를 받아 <한 정식 사진전> 열다. (22. 동 사진)

            사진과 글을 접목시킴으로써 보다 효과적인 표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내 생각의 첫 시도로사진 - 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을 간행하다..                 
               (
열화당) 이는 96년부터 2년 간사진예술, 그리고 98년부터 일년간금호 문화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것으로
            수필로 풀어 쓴 나의 사진론이다
.

2001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장 임기 만료로 퇴임하다.

             ‘미명의 새벽<강 운구, 김 기찬, 육 명심, 주 명덕, 한 정식, 홍 순태, 황 규태 등 7인전> (하우아트 갤러리) 참여하다. (23. 동 사진)

2002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정년퇴임하고 명예교수로 남다. (24. 퇴임 고별 강의)

          대구 예술대학교 사진학과 석좌 교수로 부임하다.

          제 6회 개인전 <고요>(금호 미술관) 열고 작품집고요간행하다.(열화당)

          강원도 영월 동강 사진 축전운영위원에 위촉되어 이후 2006년까지 활동하다.

2003사진의 변모현대 사진을 읽는 눈으로 개제하여 출간하다.(눈빛)

             93년도의 <관점과 중재> 전시에 맞춰 발간했어야 했던사진과 현실을 뒤늦게 간행하다.(눈빛)

           대구예술대학교 주최 토론회 <순수 사진론>에서 정 주하 교수와 토론하다.

           영월 동강 사진상 심사하다. 이후 2010년까지.

2006‘3인의 교수<육 명심, 홍 순태, 한 정식> (한미 사진미술관) 참여하다.

                (25. 이 명동 선생과 함께)

           단편 사진집흔적간행하다.(눈빛) 사진의 정체성이 기록성에 있음을 알면서도 기록성을 벗어난 곳에서 주로 작업을 해 온 것에 대한 마음           
           의 빚을 갚을 겸해서 엮은 사진집으로
, 그냥은 지나칠 수는 없었던 어떤 한 시대를 나 나름대로 기록한 것이다. 사진집 전체를 한 개가 아닌             
           몇 개의 주제로 나누어 엮은 것이라
단편 사진집이라는 부제를 붙여 발간하였다.

           대구 예술대학교 석좌 교수 퇴임 후, 백제 예술대학 명예 교수로 부임.

           한국 사진작가 협회 기관지한국사진에 연재했던사진, 예술로 가는 길을 단행본으로 간행하다.(눈빛)

20073인의 교수전에서 발표한 바 있던 <이와 같이 들었사오니>를 영월 동강 사진 박 물관에서 전시를 하면서 작품집이와 같이 들었사오니를             
             간행하다
. (동강사진 박물관)

           「사진-시간의 아름다운 풍경사진 산책으로 개제하여 간행하다.(눈빛)

              ‘한국 현대 사진의 풍경(서울 시립미술관)에 참여하다.

2008년 백제 예술대학 명예교수 퇴임하다.

           제 7회 개인전 <고요 2> 열다.(부산 고은 사진 미술관)

           같은 <고요 2> 전을 서울에서도 열다. (서울 트렁크 갤러리)

             ‘한국 사진 60(국립 현대 미술관) 참여하다.

2009년 같은 <고요> 전 일본에서도 하다. (일본 동경 아트 그라프 갤러리)

                 (26. 전시장 아트그라프앞에서 쿠와바라 시세이 선생과 함께)

2010년 사진집북촌간행하다.(눈빛) 이는 내 고향 서울이 사라져 감을 아쉬워하며 그에 관한 수필 7편을 함께 엮어 간행한 것이다. 실은,
             1994
년 서울 정도 6백주년에 맞 춰 찍기 시작했던 것인데 막상 94년이 되자 너도나도 정도 6백주년을 외치며 나오 는 통에 간행을
           포기하고 있다가 조금 더 보충해서 간행한 것이다
.

             KT&G 상상마당 주최 제3SKOPH 상 심사하다. 이후 4회까지 담당하다.

          한미 사진미술관 주최 심포지엄 한국 사진교육 초기의 정황에서 주제 발표하다. 2012서울에서 살렵니다(한미 사진미술관) 참여하다.

            ‘오리진(부산 고은 사진미술관) 참여하다. ‘오리진<카메라루시다> 해체를 아쉬워하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이룬 그룹으로, 이번에는           
          전통적 사진을 하는 작가들
(이 완교, 이 종만, 오 상조, 권 태균, 강 용석, 정 주하, 최 광호, 김 보섭, 이 상일, 이 갑철, 한 정식)이 모여
          연 전시  였으나 한번으로 끝내고 말다
.

2013년 사진집고요 Ⅱ」간행하다.(한스그라픽)

2015이와 같이 들었사오니를 보완하여 사진집고요 Ⅲ」으로 간행하다.(눈빛)

          아내 승 수연과의 혼인 50주년을 맞이하여 가까운 친척들 모시고 소위 금혼식잔치를 하다. 그간 아들 셋 모두 장가들여, 며느리 셋,
          손자 넷,  손녀 하나, 모두 열 세 식구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27. 금혼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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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년 국립현대미술관 심의를 통해 5인의 현대미술가로 선정되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한정식 전을 개최하다.

  

< 자술서 >

 

1.

내가 스물 한 살이 되던 새 해 첫날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내 시 포플러가 가작으로 입선하여 발표가 되었다.

그 시 자체는 지금 보아 별 것 아니지만, 그리하여 당선이 아닌 입선에 그친 것이지만, 그 일이 내게 미친 영향은 컸다. 무엇보다도 내가 인간적으로 조금 더 자랄 수 있었던 한 계기를 만들어 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시는 내 정체성의 일면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당시 그 시를 선정해 주신 분이 조 지훈, 노 천명 선생이셨는데 조 선생님의 심사평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시 한 편을 보시고 내 사람됨을 짚어주신 말씀이었는데, 어떻게 그 짧은 시 한 편으로 나를 그렇게 정확히 보셨는지 어린 나였지만 마음 한 구석이 뜨끔했었다. 요컨대 이 사람은 인생의 따끔한 맛을 좀 봐야 할 것 같다.”는 뜻으로 기억하고 있다. 때는 1957, 38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지 불과 3,4년밖에 안 되던 시점에서 어찌 이리 한가하고 순진한 시를 쓰고 있을까 하는 한탄이 섞인 말씀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리고 이다. 나는 퍽 현실적이었지만, 실제로는 현실성이 결여된 사람이었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어렸을 적 집안이(랄 것도 없는 것이, 어머니와 나 단 둘이었으니) 워낙 어려워서 우선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철저해 모든 일에 언제나 현실적으로 대처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실제로 부딪쳐 보면 나는 늘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어리석은 짓만 골라 하고 있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늘 놓지 못하고 있었음에도 택한 길이 시였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게 나였고 아직까지도 바뀌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다.

한 마디로 실제에 당해서는 늘 현실성이 모자랐는데, 그게 우선 현실과 부딪치는 것을 퍽 부담스러워 해서였다. 남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그것이 늘 싫었다. 그러나 그래서도 오히려 거꾸로 때로는 용감하게 직접적으로 돌파도 해 왔으나 끝내는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퍽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은 내가 실은 퍽 내성적인 성격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내 사고 방식이 긍정적이고, 비교적 건전하고 밝은 성격이어서 많은 일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응해 왔기 때문에 나를 퍽 활동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소위 다큐멘터리 사진을 않는 까닭, 아니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실을 떠난 사진은 자칫 공허해지기 쉽다는 것, 그리하여 사진의 정체성을 기록성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은 하면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쪽으로는 눈이 가지 않았다. 사진에 입문했을 때, 임 응식 선생께서 늘 사진의 기록적 가치를 강조하시던 말씀을 들으며 공부했고 그래서 한때는 그런 사진도 해 보았지만, 결국은 그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향한 내 눈길은 삶의 깊은 골짜기가 아니라 높이 뜬 흰 구름이었다. 나무가 그래서 나왔고, ‘고요시리즈가 결국은 거기에서 나온 것들이다. 나는 현실에 살면서도, 그리고 비교적 적응을 잘해 잘 살아 왔으면서도, 마음은 늘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던 것이다.

 

2.

그래서 택한 것이 순수사진(흔히 예술사진이라 일컫는)이었다. 삶의 현장을 벗어나면 그것은 자연 풍경일 수밖에 없다. 풍경도 현실이요, 따라서 풍경을 찍는 것도 기록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기록만 하는 일상적 풍경사진에 만족할 수는 또 없었다. 그리하여 단순한 외형적 풍경에서 벗어나 내면적 풍경으로 향하다 보니, 쉽게 말해서 사진적 추상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사진적 추상이라는 말이 조금 생소할 수도 있으나 추상사진이라는 말로 바꾸면 조금 이해가 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추상사진이라면 추상화를 모방한 사진을 연상시키기 쉬워 사진적 추상이라고 말을 바꾸어 본 것인데, 사진이 아류 회화일 수는 없는 것이고 따라서 추상화를 모방하는 것은 사진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추상의 경지, 다른 매체들과는 확연히 다른 추상을 사진으로 이루고자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은 무엇일까? 더구나 사진은 구체적 형태를 재현하는 데에서 출발하는 매체이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으로 해서 사진의 기록성이 운위된 것이고, 기록성이야말로 사진의 존재이유요, 가치라는 것이 정설이 된 이제 와서 왜 하필 추상일까?

여기에서 사진적 추상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을 장황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미 발표한 저술이나 글을 통해 몇 번 설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의 추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진의 주제(theme)라는 것이 추상적 개념, 관념이기 때문에 사진 역시 추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만 밝히고자 한다. 특히 순수사진의 경우 추상성은 거의 필수적 요구라 해서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더.

현대성과 구분지어지는 근대사진의 시기는 물론 아직까지도 사진의 대부분은 문학성에 기대고 있음이 사실이다. 작가나 관중이나 모두들 사진의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의미에 매달려 사진이 뜻하는 바 내용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따진다. 그러나 이 의미라는 것은 문자예술의 영역이지 비문자 예술의 영역은 아닌 것이다.(박 이문의시와 과학) 비문자 예술에도 의미라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겠지만, 그럴 때의 의미란 문학적 의미, 곧 언어로 풀이되고 언어로 이해되는 의미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것이 언어로라야 표현,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 전달이 되지 않는 의미가 이 세상에는 더 많이 있음을 흔히들 간과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아름다운 음악, 풍경, 또는 음악도 풍경도 아닌 어떤 감정 같은 것은 언어로는 표현, 전달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설악산 단풍을 보고 와서는 그 황홀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하는 말들을 무심히 한다. 하지만 이 말의 진의는 내 표현력이 모자람을 한탄하는 말이 아니라 어떤 대단한 시인이 와도 표현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데 있다. 그것은 도저히 언어로는 풀어지지 않는 시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각도 청각도 아닌 내적 경험, 감정은 도저히 말로는 풀어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매체가 생긴 것이다. 미술이, 음악이, 무용이 그래서 생겼고, 사진이 그래서 발명된 것이다. 이렇게 언어 밖의 세계는 무한하다. 이 광대무변한 영토에 무관심할 수가 없었고, 그리하여 이 언어 밖의 세계’, 사진으로라야 표현 가능한 광막한 영토 개발에 한 발 내디딘 것이 나의 사진인 것이다.

이를 완성했다고는 감히 생각지 않는다. 내가 시도한 방법론이 유일하다든가 최선이라는 것 역시 아니다. 이를 시각화, 영상화하는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작가들의 몫이고 나는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이 길을 찾아 그저 꾸준히 걸어갈 뿐이다.

 

3.

신춘문예 입선 통지서를 받고 신문사로 나가 보니 문화부장(한 운사 선생이셨다)이 입선 소감을 써내라고 내게 원고지 서너 장을 건네주었다. 원고지를 받아들고 신문사 옥상으로 올라갔다. 실은 전날 밤에 입선 소감을 뭐라고 써야 할까 생각하노라고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삐걱 삐걱, 옥상으로 향하는 목조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도 한 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 원고지를 앞에 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부연 하늘뿐이었고 머릿속은 하얗기만 했다. 망연히 서 있을 수만도 없어 초조해 하던 중에 그래도 어쩌다가 한 줄이 떠올랐다. 다음에는 무슨 말을 썼던가 거의 기억에 없지만 맨 첫 구절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인 줄은 잘 안다.”

당시만 해도(지금도 별로 변하지는 않았겠지만) 시를 쓴다는 것은 소위 밥 굶는 길이었다. 시만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이었다. 물론 각오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특히 사명감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저 까닭도 없이 좋아서 들어선 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내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이후 나는 한 번도 큰길로 나서본 기억이 없다. 시를 쓰다가 모자라는 능력을 깨닫고 문학이고 예술이고 다 포기하고는 그 때부터 담배를 배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둑도 배우고, 장기 두고, 당구 치고, 때로 화투도 쳐 가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우연히 들어선 길이 사진이었다. 인생에 우연 아닌 일이 몇이나 될까만, 내 사진과의 만남도 전에는 의식하지도 못했던 우연이었다. 나이 서른쯤 되어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들어서 보니 사진은 시보다 더 외로운 길이었다. 사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임 응식, 이 명동 선생을 비롯해 사진계 선배 몇몇 분이 남들의 시선 의식 않고 진지하게 사진을 하고 있었지만 일반적 인식은 물론이요 미술계를 비롯한 문학이나 음악 등 타 분야에서도 사진은 그냥 판박이 기술이지 예술은 아니라는 인식만이 팽배해 있었다. 그리하여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로 나도 모르게 또다시 들어선 것이다. 문학에서 풀지 못한 한을 여기에서 풀어내자고 이를 악문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내 팔자였나 보다 싶을 뿐이다.

그뿐 아니라 내가 택한 소위 순수사진이라는 것이 사진 중에서도 또 외로운 길이다.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사진의 중심이라는 인식으로 해서 내가 택한 순수사진은 사진의 변두리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역사에 남은 세계적인 작가들 대부분도 이 다큐멘터리 작가들로, 사진의 순수성(예술성)을 추구한 작가들은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적다. 수의 적고 많음이 무슨 문제일까만 그 까닭이 결국 사진의 정체성, 존재 이유와 이어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사진의 또 다른 정체성,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추상성을 추구하는 내 작업은 또다른 외로운 길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이 길을 택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한 마디로, 걷다 보니 저절로 오게 된 길, 내 심성이 찾은 길이다 보니 다 내 팔자일 수밖에. 시에서 풀지 못한 한을 사진에서 풀어보자는 앙심을 품어본 적도 없다. 내 마음 속에서 솟아오른 샘이 내를 만들고 강을 이루어 바다로 향하는 그런 간절한 목마름일 뿐이다. 그러나 이왕 들어선 길, 첫눈 내린 길에 새로운 발자국을 내고 싶은 마음으로 남들이 돌아보지 않는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을 것이다. (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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