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진에 시문학파 기념관 개관
한국 현대시의 분수령 이룬 9인의 대표시인들 한데 모아
지난 3월 5일, 전남 강진 김영랑 생가 바로 앞에서는 '시문학파(詩文學派)'라는 이색적인 기념관 개관식 및 학술대회가 열렸다.
'시문학파'는 지금부터 82년 전인 1930년 3월 5일 창간된 시 전문지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주도하였던 시인들, 즉,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 9인의 시인들을 일컫는 이름이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 특정 개인을 기념하는 문학관은 많지만 특정 문파(文派)를 기념하는 문학관은 이곳 '시문학파 기념관'이 처음이다.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22-2에 위치한 기념관은 28억여원이 소요됐으며, 1층에는 학예연구실, 세미나실, 도서관 등, 2층에는 전시실, 북카페,쉼터테라스 등이 자리잡았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우측으로 먼저 '한눈으로 보는 한국 현대시사'라는 도표가 눈에 띈다. '창조' 지가 창간된 1919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문학의 주요 분기점들을 정리해 놓은 도표이다.
'시문학'지는 1930년 3월 5일 창간하여 그해 5월 20일 제 2호, 1931년 10월 10일 제 3호를 끝으로 종간되었지만, 당대를 풍미했던 카프계열의 프로문학과 감상적 낭만주의 사조에서 벗어나 이 땅에 본격적인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시문학의 문학사적 의의는 첫째 1920년대의 이데오로기 문학의 근본적 결함을 극복하고 시의 자율성을 확보한 점, 둘째 시적 기교와 전통적인 가락을 통해 순수시의 새 경지를 개척한 점, 셋째 1920년대와 1930년대 시문학의 분획점으로서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시문학파가 형성된 1930년은 일제의 강점이 한층 더 폭압적으로 강화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 하에서 국내의 문단상황은 일제강점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목적의식은 같았지만 , 사회주의 문학운동과 순수민족문학운동 간 심각한 대립양상을 보였다. 해외문학파에서 발아된 순수문학 운동은 시문학파에 이르러 구체화되었고, 이후 구인회와 모더니즘 운동, 그리고 '시원'과 '시인부락' 동인지로 이어지면서 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맥을 형성하였다.
기념관 벽에는 시문학 창간 당시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고 있다. 즉 일본 유학시절 영랑 김윤식과 용아 박용철이 만난 과정에서부터 한국 시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시 동인지의 창간 관련 뒷이야기 등 당시 움직임을 대화형식으로 현실감있게 재현해주고 있다.
시문학파는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정치적 경향 시에 반발하여 문학에서 정치성이나 사상성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지향하고자 한 점이 가장 중요한 특색이다. 1920년대의 감상적 낭만주의 시나 민요시 또는 KAPF의 경향시가 모두 자유시의 특성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지 못했던 데에 반해 , '시문학'에 실린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등의 작품에서는 내용과 형식의 유기적 조화에 의한 자유시가 씌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시에서 언어의 조탁이라는 면에 그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또 다른 중요한 특색으로 시문학파의 시에서 은유와 심상이 비로소 제 기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물론 1920년대의 시에도 은유나 심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 시문학파의 그것과는 근본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1920년대 은유나 심상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시문학파의 은유나 심상에는 의식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흔적이 뚜렸하게 나타나고 있다.
기념관에는 시문학에 관한 다양한 볼꺼리와 읽을꺼리를 전시해 놓고 있다. '시문학'지 창간 당시의 주요 신문기사, 시문학파 탄생 이전의 대표적 문학유파들, 시문학파 탄생 이후의 대표적 문학유파들, 시문학파 전후의 주요 시인들에 관해서도 사진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다.
기념관 전시물 중에는 시문학 창간호,제 2호 및 3호 원본, 2010년 시집으로서는 유일하게 근대문화재로 등록된 김소월의 '진달래꽃'(1925), 한용운의 '님의 침묵'초간본(1`926), 청록파 3인의 '청록집'(1946), 유작을 모아 문우들에 의해 출판된 '육사 시집'(1946),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등 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희귀본들도 전시되어 있다.
영상실 앞 벽에 전시된 시문학 '창간호 편집후기'를 찬찬히 읽어내려간다.
"우리는 詩(시)를 살로 색이고 피로 쓰듯 쓰고야 만다. 우리의 詩(시)는 우리 살과 피의 매침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詩(시)는 지나는 거름에 슬쩍 읽어치워지기를 바라지못하고 우리의 詩(시)는 열 번 스무 번 되씹어 읽고 외여지기를 바랄 뿐, 가슴에 늣김이 잇을 때 절로 읊어 나오고 읊으면 늣김이 이러나야만 한다. 한 말로 우리의 詩(시)는 외어지기를 求(구)한다. 이것이 오즉 하나 우리의 傲慢(오만)한 宣言(선언)이다". 현재의 한글 기준으로는 철자법이 이상하지만 한마디로 가슴 뭉클한 글이다. 우리가 지금 쓰는 시는 과연 '살과 피의 매침'인가? 필자 스스로 자문해본다.
시문학파에 대한 유명시인들의 글귀도 보인다.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한 오세영 시인(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은 "순수시의 범주를 크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살필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순수시와 좁은 의미의 순수시가 그것이다. 전자는 20년대적 성격에 대응하여 30년대 시가 갖는 일반적 성격을 가리키며, 후자는 30년대 시 가운데서도 시문학파로 대변되는 시 유파를 지칭한다"고 평한다.
조창환 시인(아주대 명예교수)은 "문학의 본령을 회복하여 시의 예술적 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다는 점은 시문학파의 공적"이라고 평한다. 또 김윤식 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는 "시문학파에 이르러 비시적 태도는 불순한 것으로 단정되어 시적인 것, 시 본연의 자세가 추구되기 시작했다"고 평한다.
조지훈 시인은 '현대시의 계보'에서 "시문학파가 시의 조탁, 각도의 참신, 형식의 세련 등 종래의 시를 일변(一變)시켰다는 것은 중론이 일치하는 바, 그들은 한국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루었다"고 단언한다.
시문학파 기념관의 하일라이트는 '시인의 전당 코너'. 자작나무 조형물 앞에 책장 형식으로 꾸며진 '시인의 전당'에는 시문학파 시인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시인 등 9명의 사진과 주요문학적 업적, 발간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전당'을 돌아 입구 쪽에 이르면 넓은 공간 벽에 오세영 시인 및 시문학파 자손들과의 인터뷰 내용 등이 동영상으로 흐르고, 한편에는 시문학파 시인들의 시가 애미메이션으로 각색되어 명멸하고 있다.
오후 2시, 세미나실에서는 박균조 강진군수 권한대행, 김은식 군의회 의장을 비롯한 기관단체장, 시문학파 동인 자손 및 전국각지에서 찾아온 문인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관기념식이 열렸다. 김선기 기념관 학예연구실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개관행사에는 특히 용아 박용철 시인의 3남 박종률 씨, 정지용 시인의 손자 정운영 씨, 영랑 김윤식 시인의 손녀 김혜경 씨, 위당 정인보 시인의 4남 정양모 씨, 수주 변영로 시인의 장손 변창순 씨, 김현구 시인의 차남 김문배 씨, 신석정 시인의 3남 신광연 씨 등도 참석, 눈길을 끌었다. 자손들을 대표해 단상에 선 박용철 시인의 3남 박종률 씨는 선친의 삶과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복바치는 슬픔을 억제하지못한 듯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개관식 및 테이프 커팅에 이어 오후 3시부터는 '시문학파의 시사적(詩史的) 성격'에 대한 기조강연, ' 시문학파의 문학적 위상 및 미의식' 등에 관한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조창환 아주대 명예교수를 좌장으로 한 이날 세미나에서 먼저 오세영 서울대 명예교수는 '왜 시문학파인가'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에서 시문학파의 문학적 순수성에 대하여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분하여 그 특징과 성격을 규명했다.
오세영 교수는 시문학파의 문학적 순수성에 대하여 '1920년대 목적문학에 대한 대타개념, 단지 목적문학을 거부하는데 그치지않고 역사와 현실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둔 점, 예술성의 탐닉, 대중문학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순수문학' 등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는 '순수서정을 노래한 점, 지적인 요소가 가능한 배제되어 있는 점, 표현이 여성적인 점, 시의 언어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언어의 감각성을 추구하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점, 유미주의적 태도와 미(美)의 자율적 규범에 대한 인식, 낭송 혹은 낭독을 염두에 두고 시작(詩作)을 했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제시했다.
이어 제1주제발표자인 최동호 고려대 교수는 시문학파의 생성과정에 주목하면서 문학사적 의미망을 확장하여 동시대적 질서와의 상관성의 관점에서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의미를 파악했다. 우선 시문학파와의 이질적인 지점에 놓여 있었던 1930년 전후의 카프파와의 대립적 시각을 작품의 대비를 통해 규명하고 다음으로 시문학사에서 간행한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의 문학사적 의미를 확장시켜 논한 다음 마지막으로 시문학파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청록파와의 연속성을 통해 시문학파의 문학사적 동선을 동시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제2주제발표자인 정과리 연세대 교수는 "시문학파의 등장은 흔히 '시의 미학만을 추구하겠다는 순수한 예술적 심미적 태도를 지닌 시인들이 탄생'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순수한 심미적 태도' 혹은 '순수서정시'의 입장이 말 그대로 현실과 무관하게 살겠다는 폐쇄적 모임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며, '문학의 성립은 그 민족의 언어를 완성시키는 길'이라는 박용철의 진술에 기대어 그러한 태도를 민족주의 이념의 한 실행으로 보는 관점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동호 교수 및 정과리 교수의 각 주제발표에 대하여는 임환모 전남대 교수, 김선태 목포대 교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학술세미나는 깊이가 있고 진지했다. 오후 4시 반에 끝낼 예정이었던 세미나가 6시까지 계속됐다. 청중들도 대부분 끝까지 자리를 뜨지않았다. 기념관 관계자들, 세미나 발표자 및 토론자들, 그리고 시문학파 동인 자손들이 한데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행사 전체가 마무리됐다. 강진의 하루는 시문학파 동인들의 시향(詩香)으로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글,사진/임윤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