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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한국의 대표적 문예지 <시안> 세로쓰기 조판 선보여
-느리게 읽는 시의 참모습 찾으려
역시 '오탁번답다'. '오탁번스럽다'
이 말은 오탁번 시인을 아는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잘 알께다. 갑자기 뒤통수 치듯 엉뚱한 말, 돌려치기를 하는 오시인의 재치와 유머감각 등을 일러 그를 아는 사람들이 종종 쓰는 수식어이다. 그의 유머 속에는 결코 유머 만으로 그치지않는 무엇이 숨어 있다. '유머 속의 진실'이라고나 할까? 신춘문예3관왕, 고려대명예교수, 전 한국시인협회장 등의 프로필이 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인 오탁번 시인은 그런 분이다.
그 오탁번 시인이 이번에 또 엉뚱한 짓(?)을 했다. 창간된지 15년이나 되는 문예지 '시안'을 올해 봄호부터 갑자기 세로쓰기로 바꾼 것이다. 스마트폰이 온통 판치는 세상에 조선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모양의 세로쓰기 조판이라니... 정말 엉뚱하다. 이걸 '파격'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돈키호테적인 '역설'이라고 얘기해야 되나? 이 경우의 적절한 인용은 아니겠지만 평론가 휠라이트의 설명대로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선 의미', '모순 속에 내포된 진리'가 '반어(反語)' 또는 '역설'의 의미라면 아뭇튼 '상식을 넘어선 파격'인 것 만은 틀림없다.
오탁번 시인은 <시안> 봄호 편집후기에서 "눈부시게 진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떡하니 세로조판을 하는 것은 시계를 꺼꾸로 돌리는 일이라는 걸 왜 모르랴. 허지만 <시안>은 휙휙 읽어치우는 가로조판의 시들과 작별을 고하고, 옛날로 돌아가서 찬찬히, 천천히, 느리게 읽는 시의 참모습을 다시 살려내려고 한다. 한 편의 시를 左右로 재빠르게 읽지않고 上下로 꼼꼼히 읽을 때 시의 진정한 뜻과 어조가 살아나게 된다."고 말한다. 아, 그렇구나.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구나.
너무 빨리 변하고 너무 빨리 달리는 세상에 '느림의 미학'을 찾는다는 발상 역시 놀랄만한 실험이다. '구시대로의 회귀'같은 실험. 꼭 '실험'이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앞서가는 실험이어야만 되나? 굳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인용하지않더라도 꺼꾸로 가는 실험도 얼마나 기발한 발상인가? 근래 소위 '슬로우 시티'가 생기고 올레길, 둘레길 등 느리게 걷는 운동이 급속히 퍼져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맥락은 아닐까?
문고판같이 아담한 <시안> 봄호는 표지에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아낙과 그 여인 등에 기대있는 사내를 그린 신윤복 화가의 춘화를 실은 것 부터 이채롭다.
책장을 펼쳐보면 또 한번 놀란다. '현대시의 본디'라는 섹션으로 소개된 앞 페이지에는 정지용 시인의 시 '忍冬茶', 서정주 시인의 시 '西風賦'가 퇴색된 종이모양 그대로 실려있다. 두 시는 각각 1941년과 1940년 출간된 시집과 문예지에 실린 원본 그대로 인쇄돼 있다.
"현대시의 본디를 찾는 일은 이미 사라져버린 과거의 흔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세로 조판의 시를 찬찬히 읽으면 그 안에 살아있는 시어의 숨과 결이 도렷이 눈을 뜨고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영롱한 저 눈빛! 우리는 시를 너무 빨리 쓰고 빨리 읽는다. 읽는 게 아니라 그냥 빠르게 본다. <현대시의 본디>는 우리들이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는 시의 원형"이라고 설명한다. 오탁번 시인은 "<현대시의 본디>에서 소개하는 작품의 모습, 이게 진짜 우리 현대시의 맨얼굴이다. 우리에게도 이처럼 書畵를 읽듯 귀하게 정성들여서 시를 읽는 시대가 있었다. 그때가 그립다. 그때 거기로 돌아가고 싶다. 올레길을 가듯 노을을 바라보며 쉬엄쉬엄 걷는다"고 말한다.
세로쓰기 조판에 대한 문단의 반응도 사뭇 뜨겁다. 고은 시인은 책을 보기도 전 세로조판을 한다는 말에 "오선생, 멋있겠다"며 신작시를 보내왔다고 한다. 김남조 시인은 "시안 편집후기를 보니까 눈물나더라"는 소감을 밝혔다고 한다. '마치 우포늪에서 함박눈을 맞는 느낌'이라는 반응도 있었고, '책장 넘기는 것을 아껴가며 읽는다'는 반응도 있다. 구독신청부수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반응이 의외로 좋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아파트가 계속 지어지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면 들어설수록 고색창연한 가구, 골동품같은 가구가 인기가 있듯이 우리문단에서도 골동품같은 문예지가 새로 태어난 것이다.
오탁번 시인은 이에 대해 "여름에 에어컨이 아무리 '빵빵하게' 돌아가더라도 부채가 있어야 하듯 우리 것을 지키는 골동품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우리 말엔 진짜 좋은 게 많다. 우리네 정서와 모국어에 대한 소중함을 느껴보라는 의미에서 읽기에 까다로운 세로쓰기를 택했다. 읽기 싫으면 관두라는 배짱도 좀 들어 있을 게다. 시를 귀하게 읽고 귀하게 쓰자는 의미다. 다행이 반응이 좋아서 한숨 돌리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 번에 <시안> 겨울호를 내고 진짜 그만 접을까 했었다. 그런데 <시안>이 보채는 소리가 귀를 막아도 자꾸 들려왔다. 1998년 가을에 창간한 <시안>이 어느새 15년째가 되었다. 열다섯 살. 한창 말썽피울 나이다. 그래그래, 내가 졌다. <시안> 너, 잘났다". 오 시인의 편집후기 중 한 구절이다. 역시 오탁번다운 후기글이다.
오탁번 시인의 <시안> 세로쓰기 조판과 관련하여 지난 3월 21일 문화일보가 <수요초대석>에서 취재를 한 적이 있다. 인터뷰내용을 보니 그의 결혼 당시 에피소드가 나온다. 필자도 처음 듣는 얘기라 재미(?)있어 여기에 인용해 본다.
"시 계간지를 매년 펴낸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 특히 점점 시를 멀리하는 요즘 세태에선 해가 갈수록 어려움이 더해진다. 그럼에도 ‘시안’이 15년째 버틸 수 있었던 데는 물론 오 시인의 ‘고집’이 가장 큰 몫을 했지만, 부인 김은자(64·전 한림대 교수) 시인의 내조 또한 컸다. 지난 2월 정년을 1년 앞두고 한림대에서 명예퇴직한 김 시인은 남편의 ‘무모함’에 적극 찬동, ‘시안’이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데 원군 역할을 단단히 했다. 이처럼 ‘시안’의 산파 역할을 맡은 두 사람의 인연 역시 ‘시(詩)적’이다.
오 시인은 고려대 재학 시절부터 이미 명성이 자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대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1966년 동화 ‘철이와 아버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을 비롯, 이듬해에는 시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가 중앙일보에 당선되는 등 촉망받는 신예 문인이었다. 게다가 1969년엔 소설 ‘처형(處刑)의 땅’이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신춘문예 3종3관왕’의 기록을 갖고 있다.
이처럼 문명(文名)을 떨치는 청년에게 어찌 러브레터가 쇄도하지 않았겠는가. 당연히 숱한 연서(戀書)가 날아들었고, (오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1대 그룹’으로 미팅을 가질 정도였다. 한 사람씩 만날 만큼 시간이 안 됐다는 얘기다. 그러던 중 하루는 고려대 학보사로 편지가 한 통 날아왔는데 오 시인의 시에 대한 감상과 함께 발신자 이름만 달랑 적혀 있었다. 바로 ‘김은자’다. 다른 여학생 같으면 학교 주소를 적든지 해서 신분을 밝히기 마련인데, 이 편지는 단지 이름 석 자뿐이었다. 하지만 ‘오탁번’이 누군가. ‘이 정도 글을 쓸 여학생이면 분명히 대학신문에 글이 실렸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서울 소재 각 대학의 학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대 학보에서 ‘김은자’라는 필명을 발견했다. 이후의 연애담은 각자 상상해 보시길..."
고려대 명예교수이며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아침의 豫言’,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 ‘겨울강’, ‘1미터의 사랑’, ‘벙어리장갑’, ‘손님’, '우리동네' 등 다수의 시집을 낸 바 있는 오탁번 시인은 현재 충북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에서 '원서문학관'을 꾸리고 있다. 자신이 다녔던 백운초등학교 애련분교가 페교되자 2003년 3월에 이를 사들여 꾸민 것이다. 일주일에 절반 정도는 원서문학관에서 머물고 나머지 절반은 서울에서 기거하며 <시안> 일을 한다. 2년 전에 펴낸 시집 '우리동네'를 보면 그의 고향사랑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내가 사는 愛蓮里의 三絶은
제비, 수달, 반딧불이이다.
나는 이제
제비똥, 수달똥, 반딧불이똥이나 돼야겠다.
시인 스스로를 愛蓮里의 四絶에 포함시키지 않고 겨우 “제비, 수달, 반딧불이의 ‘똥’이나 돼야겠다”니, 얼마나 오탁번다운 표현인가. 오 시인은 늘 이렇다.
1966년 동아일보(동화), 1967년 중앙일보(시), 1969년 대한일보(소설) 등 신춘문예 3관왕을 기록했고, 고려대 교수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의 대표적인 문인, 학자이면서도 스스로를 낮춰 ‘헛똑똑이’라고 말하는 시인. 오 시인의 고향 애련리는 시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야생화가 나비와 벌을 유혹하고 제비가 날아와 새끼를 치는 곳, 반딧불이가 밤하늘을 수놓고 백로가 산허리를 베며 날아가는 곳, 박달재와 천둥산 사이에 수줍은 야생화가 숨어 있는 곳'이다.
遠西軒이란 이름의 遠西는 백운면의 조선시대 지명으로서 ‘제천에서 서쪽으로 가장 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몇십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의 옛이름을 찾아준 셈이다. 교실 3개 짜리 건물을 사무실, 자료전시실, 강의실로 개조하고 정원에 나무와 꽃을 심고 조그만 연못도 꾸며 창작분위기가 절로 나게 만들었다. 전체 1,700평 중 1,000편은 문학관과 마당 등으로 쓰고 나머지 700-800평은 텃밭으로 꾸몄다. 문학관 입구에는 400년된 느티나무도 있어 시골정취를 더한다. 그곳에서 오탁번 시인은 오늘도 아직 끊지못한 담배를 물고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오탁번다운 시, 오탁번스러운 문예지를 구상하고 있을 것 같다. (글,사진/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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