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물과 직접 만나는 삶
이건청 시인 열한번째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 펴내
지난 2년간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맡았던 이건청 시인이 최근 열한번 째 시집 '굴참나무 숲에서'(서정시학)를 펴냈다. 2010년초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이후 2년 만의 시집이다.
이건청 시인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양대 명예교수로서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중 한 분이다. 이시인은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목마른 자는 잠들고', '망초꽃 하나', '하이에나', '코뿔소를 찾아서', '석탄형성에 관한 관찰기록', '푸른 말들에 관한 기억',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등의 시집과, 기획시집 '청동시대를 위하여', 시선집 '해지는 날의 짐승에게', '움직이는 산'과 이건청 문학선집'(전 4권) 등이 있다. 또 연구저서로 '문학개론', '윤동주-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초월의 양식',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윤동주', '한국현대시인 탐구' 등을 낸 바 있다.
앞 개울물 소리
나는 듣지 못하지,
뒷산 넘겨봐도
보지못하지,
귀도 눈도 흐린 내가
물새소리도,
떨어지는 동백꽃도
놓친 채 이렇게 살다가
두물머리 넓은 물에 그냥 섞인다면,
마현마을 포구에서
자맥질하는 물닭들도
그냥 스쳐가야 하리,
큰 강 거센 흐름에 섞여든 채
핏빛 노을
떠메고 바다로 가는
벙어리강 되리,
장님 강 되리
시<벙어리 강> 전문
이건청 시인은 오랜 도시생활을 끝내고 양촌리 모가헌으로 옮겨산 지 10년이 넘었다. 시인은 시집 말미에 올린 그의 산문 <시에 대한 요즘의 생각>에서 생애 동안 일관해서 추구해온 자신의 시업에 관해서 허심탄회하게 돌이켜볼 수 있는 자리에 왔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사물과 직접 만나려는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도 되었다'고 말한다.
이 시인은 관념이나 논리, 상식에 묶여 살아온 생애를 '사물과 직접' 만나는 삶으로 안착시켜 보려 하는 것이다. 의미의 세계를 벗어나 감각의 세계에 닿으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원시'의 즉물적 세계로 돌아가 최초의 자연 속에 살면서 천진난만하던 '나'를 다시 정좌시켜보려는 노력에 다름아닐 것이다. 의미의 세계를 버겁게 따라 살다 보니 의식 자체가 남루에 덮이고, '참나'여야 할 상상력과 감수성은 기력이 낡아버려 탄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건청 시인은 이제, 나머지 생애를 상상력과 감수성에 의탁함으로써 일어버린 '나'를 되찾아보고싶다고 말한다.
곰소 염전 곁 객사에 누워
하루를 잔다.
짠 바닷물은
마르고, 다시 마르며
결장지까지 와서
소금으로 갈아 앉는데,
이 마을 드럼통들 속에서는
새우와 바닷게들도
소금을 끌어안은 채
쓰린 꿈속에서 제 살을 삭혀
젓갈로 곰삭고 있을 것인데,
(중략)
곰소 염전 곁 객사의 사람도
내소사 전나무 숲 위에 뜬
초롱초롱한 별도 몇 개
꿈속에 따 넣으며
쓰린 잠을 자는데,
소금을 끌어안고 잠자며
젓갈로 삭아가고 있는데……
시 <곰소항에서> 부분
아주대 곽명숙 교수는 이건청 시인의 시에 대해 “최근 그의 시 작품들은 맑고 간소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친화적인 생명력을 추구해가는 경건한 순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위를 품지 않은 언어의 화음을 보여주는 근작시들을 읽다보면, 골짜기를 거친 물이 하구에 이르러 장강을 이루듯이 한층 유장해진 느낌을 얻곤 한다”고 평한다.
곽명숙 교수는 이어 “그가 자유롭게 서정의 정신을 구가하며 비상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시집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로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은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시집에서는 더 근원적인 세계를 향한 동경과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펼쳐놓은 바 있었다. 이 시집에서 이건청 시인은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그리고 울산 바다의 고래에서 생명력의 오브제와 현대 문명에 대한 생태적 대안의 상징을 발견하였었다. 최근작들에서 시적 대상을 찾고 노래하는 태도가 고대의 화석이나 먼 흔적을 뒤좇는 방식과는 다소 달라진 듯이 느껴졌다. 생명력에 대한 동경이라는 근원적인 자세는 여전히 같지만,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교감을 몸과 언어의 긴밀한 감촉과 뒤섞어 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서적 교감이 특정한 어떤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오롯이 솟아나고 있다는 것, 이점이 그의 시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 장소는 삶의 무늬와 유비적인 관계에 놓인 상형문자와 같이 우리 삶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데, 그것을 이건청 시인은 순연한 시적 언어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고 풀이한다.
도끼로
통나무 하나를 내리친다.
도끼날에 갈라진
나무 속,
여기 저기
벌레들에 파 먹힌 흔적이
여실하다.
소나무가
이 많은 상처를
품어 안고도,
낙락장송처럼
비탈을 지켰음을,
둥치가 견딘 이 아픔으로
가지에
잎을 내고
송화도
피워 올렸던 것을.
시 <백발의 날> 전문
사물을 향한 간절한 그리움이 시적 긴장(tension)을 이루는 것이라고 이건청 시인은 믿는다. 그리움의 삶은 실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건청 시인은 "실제 눈으로 '보고', 실제 귀로 '듣고', 피부로 '닿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시적 긴장에 닿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관념이나 타성에 기대 사는 사람은 진짜 '그리움'을 소유할 수 없다. '그리움'은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운 것들은 멀리 있다. 멀리 있는 것들을 놓아버리지않으려는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그리고 '맑은 눈'으로 보고 '맑은 귀'로 사물과 현실의 실체를 보려는 쉼 없는 탐색은 언제나 '사물'에 이어져 있다. '사물'에 닿아 있는 동안 우리의 삶은 연하고 보드라우며 따뜻한 봄날의 양지쪽이다"라고 술회한다.
네가 오기까지
(오기는 올까마는)
하늘말라리도
알락실잠자리도 불러
함께 기다릴게
능수버들 아래서
기다릴게
기진맥진 지친 몸으로
네가 올 때까지
지등도 밝혀둘게.
시 <연어> 전문
요즘의 한국 시가 잡다한 수사와 요설로 길어진 현상은 문학수업이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건청 시인은 "시인이 시 창작과정에서 간명한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존재해야 할 유일의 구조에 닿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야 말로 시인이 평생의 '일'로 감당해야 할 과업이다. 시의 형상화란 '존재해야 할 유일의 구조'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밤깊고
안개 짙은 날엔
내가 등대가 되마.
넘어져 피나면
안되지.
안개 속에서 키 세우고
암초 위에 서마.
네가 올 때까지
밤새
무적을 울리는
등대가 되마.
시 <네가 올 때까지> 전문
이건청 시인은 산문 마무리 글에서 " 이제 나는 시인으로 첫 출발할 때의 다짐들 속으로 다시 가서 귀를 기울일 것이다. 순정한 정신과 열정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물 속으로 가서 간명하고 단순한 것들과 친교를 넓힐 것이다. 그리고 40여년 시업을 깊이있게 성찰하면서 나의 시가 '늙은 시', '나태한 시'에 기대서는 안 된다는 새삼스런 다짐도 해 본다”고 말한다.(정리/임윤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