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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 초대전 “하늘바라기”

장은선갤러리
등록날짜 [ 2023년05월31일 14시51분 ]
 윤경 초대전 하늘바라기장은선갤러리

 

2023.6.7 () ~ 6.17 ()

장은선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19 / 02-730-3533

www.galleryjang.com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출신의 중견작가인 윤경선생님은 나무를 그린다.

의인화한 나무를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하는데 그의 나무 그림은 하늘을 우러르는 구도가 많다.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나무를 작가만의 색채와 기법를 통해 서정적인 분위기로 표현해 마음에 큰 위로를 건넨다.

 

윤경 작가에게 있어 월등히 큰 존재로서의 나무는 말 없이 곁을 내주는 큰 위안이 되는 존재다. 그의 나무는 인간을 닮아 있어 속에 깃든 아름다운 사유의 흔적을 남겨놓는다. 곧게 자라는 방향성을 지닌 나무를 통해 자연스럽게 정중앙의 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는 자연스럽게 하늘을 우러르는 구도가 나온다. 작가의 초기 작업은 나무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며 나무 조각이나 톱밥 또는 숯을 사용하여 나무의 개념적 속성만을 드러냈다. 질감을 강조하는 숯을 사용하는 작업에서 이어가 물감의 층을 형성해 물감만으로 질감 효과를 나타낸다. 물감을 톱밥처럼 수십 차례 흩뿌리는 방식으로 형성해 이전의 작업과 이미지의 공통성을 유지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의 작업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이룬다. 작가의 색채는 실제를 통해서가 아닌, 의식과 감정의 흐름에 의해 결정되어 작가만의 독특한 색채가 완성된다.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드러나는 하늘은 현실적인 색채와 다른 이질적인 색채로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푸릇푸릇한 식물들이 자라는 6. 무더위에 지친 일상에 위로가 되어주는 나무작품 30여점을 장은선갤러리에서 선보인다. 윤경 작가는 이화여대 및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 아트페어 20회를 비롯해 개인전 18회 및 그룹전 120여회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기독교미술대전 특선 및 입선5회 등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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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경의 작품세계

 

의인화한 나무를 에워싸는 아름다운 서정성

 

신항섭(미술평론가)

 

인간과 마찬가지로 직립하는 나무는 늘 무언가를 갈구하듯 하늘을 향해 팔을 뻗고, 손을 내민다. 그렇다. 나무는 인간보다 하늘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열망의 몸짓을 한다. 수많은 나무가 저마다의 자리, 즉 산이나 강가나 들녘이나 마을 어귀 그리고 삭막한 도시 풍경을 거들며 존재한다. 인간이 유독 나무를 좋아하는 건 은연중 하늘에 더 가깝다는 사실에 이끌리기 때문이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과 나무는 직립한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밀착되고 있지 싶다. 나무는 천년도 넘게 산다고 하니 하늘이 주는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나무를 본보기 삼아 하늘을 우러르며 사는 건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무게를 덧붙이는 일일 수 있다.

윤 경의 나무 그림은 유독 하늘을 우러르는 구도가 많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서면 자연스럽게 하늘을 우러르게 된다. 나보다 몇 배, 심지어는 수십 배가 되는 나무가 적지 않으니, 그 모양을 눈에 담으려면 필시 하늘과 마주하게 된다. 일상적인 시선으로 마주하는 나무의 모양과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나무의 모양은 크게 다르듯이 하늘도 그렇다. 멀리서 바라보는 나무는 줄기와 가지 그리고 무성한 잎으로 덮인 온전한 한 그루를 보여주고 있으나,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나무는 온 가지를 사방으로 뻗어 잎이 하늘을 가리는 모양새가 된다. 나무를 보려다가 하늘도 함께 보게 되는 셈이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리는 가운데 가지 사이로 드러나는 하늘은 한층 더 높게 보인다. 그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채 나뭇가지 사이로 시야에 들어오는 하늘은 확실히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쪼가리 하늘이라는 표현이 제격이다. 나무를 통해 올려다보는 하늘은 방향성을 가진다. 머리 위, 그러니까 정중앙을 올려다본다는 의미가 있다. 이처럼 정중앙의 하늘을 본다는 건 나무를 통해서가 아니면 안 된다. 나무의 존재 방식은 오로지 곧게 자라는 수직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의 모든 그림은 나무로 채워진다. 나무에 그토록 집착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자리한 곳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면서도 인간에게는 많은 걸 가르쳐주는 무언의 존재 방식에 감동해서일 터이다. 인간보다 월등히 큰 존재로서의 나무에 기댈 수 있다는 일 자체가 인간에게는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가 나무를 그림의 소재로 삼게 된 건 여기에서 있는지 모른다. 어디에서건 어느 때건 말없이 곁을 내주는 그 존재 방식은 철학자적인 면모까지 갖추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나무, 나무, 나무뿐인 그의 그림은 이전까지 보아온 일반적인 나무 그림, 즉 재현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도 나무 색깔이 일반적인 초록이 아니다. 나무도 계절에 따라 다른 색깔로 치장한다지만, 그의 나무는 계절색과도 별다른 관계가 없어 보인다. 물론 작품에 따라서는 가을 색인 갈색처럼 계절색에 맞추기 어렵지 않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딱히 가을의 상징색 가운데 하나인 갈색을 일부러 맞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색깔은 사실적인 색채이미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계절색을 완전히 무시하는 건 아니다.

작품에 따라서는 색채를 통해 계절을 유추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렇더라도 특정의 계절을 의식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에게 색채이미지는 현실적인 감각을 반영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실재하는 나무를 통해 받아들이는 감동의 표현이기에 현실적인 감각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그의 작업에서 색채이미지는 실제를 통해서가 아닌, 의식과 감정의 흐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현실적인 색채이미지가 남아 있더라도 실재하는 나무의 색깔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그의 초기 작업은 나무를 소재로 하는 데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누구나 소재로 삼는 나무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법과 다른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묘사를 하지 않고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그 결과 나무라는 물성에 착안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무 조각이나 톱밥 또는 숯을 사용하여 작업했다. 이들 재료를 이용해 나무 형상을 만들고 채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나무를 실제처럼 착각하도록 하는 일루전이 아니라 나무 그 자체의 직접적인 제시이다. 이렇게 보면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묘사방식인 사실주의나 인상주의가 지향해온 실상의 재현 또는 실상의 재해석과는 완연히 다른 현대미학을 수용하게 된 셈이다.

나무라는 형상이 있을 뿐 묘사가 존재하지 않으니 물질로서의 가치, 즉 물성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남을 뿐이다. 또한 나무 조각이나 톱밥, 그리고 나무로 만들어진 숯을 사용함으로써 물감이 지어내는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조형 세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자잘한 나무 조각을 이어 붙여 나무 형상을 만드는 과정은 현대미학의 방법론과 일치한다. 오브제의 활용일 수 있고, 질료로서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나무 조각으로 전체를 메우기도 했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작업은 지극히 개념적이다. 나무라는 실재하는 재료를 사용하나 작업은 실제와는 상관없는 개념적인 이미지일 따름이다. 묘사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상황이다. 나무라는 실재하는 소재가 있음에도 그림으로서의 묘사 또는 표현과는 전혀 다른 물질을 사용하여 단지 나무의 개념적인 속성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무 조각, 톱밥, 숯이라는 재료는 나무 그림이라는 대전제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하나의 개념적인 재료일 뿐이다.

이렇듯이 그의 작업은 나무의 형상이라는 데서 출발하여 점차 오브제 사용을 줄여나가면서 회화적인 이미지를 복구하게 되었다. 즉 물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면서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지향하게 된다. 따라서 유채색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한편 다양한 색채이미지로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친 그의 작업은 한층 부드럽고 온화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나무 조각은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하고 대신에 고운 입자의 톱밥의 활용이 증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나무라는 질료로서의 직접적인 제시라는 방법에서 벗어나 물감만으로 질감 효과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묘사방식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나무나 톱밥 그리고 숯을 사용하던 작업에서 강조되었던 질감 효과를 이어가고자 한다. 이러한 근거는 물감을 수십 차례 흩뿌리는 방식으로 두꺼운 질감, 즉 물감의 층이 형성되도록 작업하는 데 있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현대미학에 관한 수용이다. 이로써 톱밥을 사용해온 이전의 작업에 근사한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한마디로 톱밥을 사용하던 이전의 작업과 시각적인 이미지의 공통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숨기지 않는다.

회화적인 이미지를 중시하게 된 최근 작업은 풍경화 구도, 즉 나무들이 수평적으로 줄 지어서는 구도가 등장한다. 이전에는 주로 나무 한두 그루 많아야 너더댓 그루에 그치는 구성이었다면, 최근에는 숲을 이루는 형태가 된다. 같은 나무들이 줄을 잇거나 밀집하여 숲을 이루는 구도가 적지 않다. 그런데도 특정의 색채만을 사용하여 현실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관념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하늘색도 현실적인 색채감각과는 무관한 초록색, 붉은색과 같은 이질적인 색채이미지로 꾸민다. 그런 가운데 별들로 빼곡히 채워지는 밤하늘 풍경도 즐기는 작업의 하나이다. 바닥에 누워 나무를 올려다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드러나는 하늘은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나무와 함께 보이는 하늘은 제한적임에도 일상적으로 바라보는 하늘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나무와 함께 본다는 건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본다는 의미가 있다. 더구나 생명체로서의 나무 사이로 올려다보는 하늘은 관념적인 하늘이 아니라 실제적인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나무는 하늘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물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일상적인 삶의 희로애락을 넌지시 지켜보는 수호자일 수 있는가 하면, 힘들 때 가까이서 속삭이며 토닥여주는 큰 위안의 대상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그림에서 보는 나무는 인간을 닮아 있는 듯싶은 것도 이에 연유한다. , 의인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단지 위안의 대상이라기보다 말을 걸고 마음을 열게 하는 존재로서의 나무, 즉 동반자 관계임을 천명하려는 것일 수 있다. 그러기에 많은 걸 생략한 채 단지 나무가 지닌 존재성과 거기에 깃들이는 아름다운 서정성만을 남겨 놓는다. 이미지의 간결성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말하고 싶은 많은 걸 함축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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