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선 작가 초대전 “남겨진 순간들”
김재완 기자 = 2023년 12월 8일 오후 2시 광화문 내일신문사 갤러리 내일(대표 박수현)에서 “남겨진 순간들” 류지선 작가 초대전 개막식이 개최되었다. 본 전시는 12월 20일까지 열리다.
류지선 작가의 작품에는 항상 어디론가로 조용히 향하는 말이 등장한다. 말은 역동적이지 않고 항상 차분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말 위에 새로운 풍경을 손상되지 않게 실은 채 향유 하고 있다. 작품에서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말은 고요한 상상의 자연 풍경을 여행하면서 마치 현실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회귀의 욕구를 드러낸다.
한편으로 작가의 말은 거주의 문제로 이주를 계속 해야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상상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현대인들의 욕구를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도화선을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서길헌(미술비평, 조형예술학박사) 평론에서 ‘닿을 수 없는 오아시스’
류지선의 그림에 등장하는 말들은 등에 여러 형태의 집을 싣고 끊임없이 떠돈다. 그 모습이 유독 떠돈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대개 조용히 터벅터벅 걸어서 정처 없이 걷고 있는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의 그림에서 말들은 항상 어딘가로 계속해서 걸어서 묵묵하게 이동하고 있다. 말이 소란스럽게 달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조용히 걸어 다니는 이미지에서 어딘가 사색적으로 이동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 말들은 머물지 않고 어디로든 떠나야만 하는 이동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배회한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이 끊임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그림에서 말이 등장하는 장소들의 특징과 말이 등에 싣고 다니는 여러 형태의 집에 주목해 본다면 떠도는 말은 어디를 가던 그 어디에도 머물고자 하지 않고 늘 보다 더 나은 다른 장소를 꿈꾸는 듯한 몽상의 산책자처럼 보인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과일나무에 과일들이 탐스럽게 매달린 풍경들이 나타난다. 그곳은 여유 있게 펼쳐진 저택의 정원 같기도 하고 잃어버린 파라다이스 같기도 하다. 그러한 꿈과 같은 공간에 탑처럼 쌓아 올린 집을 등에 실은 말이 등장한다. 말은 비죽이 고개를 내밀어 울타리를 잘못 넘어 들어온 것 같은 표정으로 무심코 남의 집 정원을 엿보는 듯도 하고, 시간여행을 하다가 문득 미지의 공간에 불시착한 환영처럼 낯선 그림자로 보이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말은 원래 그곳에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닌 문득 그곳에 틈입해 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생경하게 보인다. 어차피 말은 또 어딘가로 이동하기 위해 어느 곳이든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이 잠시 그곳에 머물고 있음으로써 그곳의 공간은 말의 몽환적인 시선에 의해 불현듯 잊혀 있던 욕망이 고개를 드는 장소로 바뀐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서 말은 등장하는 장소에 대한 시각적 욕망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말이 다른 곳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욕망의 장소도 계속해서 바뀐다.
등에 자신의 집을 얹고 또 다른 집이나 이상적인 거주지를 기웃거리는 말의 처지는, 살고 있던 집에서 추방당하거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거처를 옮겨야만 하는 숙명적인 상황을 암시한다. 이때 등에 싣고 다니는 집은 한때 거주지였거나 잃어버린 이상적 공간에 대한 강박적인 기억의 망루처럼 보인다. 말이 자신의 집을 잃고 떠도는 것인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그것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아 떠도는 것인지, 그림 속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집을 잃고 타의에 의해 떠도는 것이든, 스스로 터전을 버리고 떠도는 것이든, 그림을 지배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마드적 이동의 숙명으로 보인다.
이처럼, 류지선의 작업에서 말은 끊임없이 이동하는 유목민적 메타포와 함께, 그림 안에서 각각의 다른 장소나 공간, 또는 시간을 연결해 주는 고리로서의 매개적 메타포라는 이중의 기호로서 기능한다. 즉, 말은 어느 장소이든 언젠가는 머무를 수 없기에 특정한 장소에 정주하지 않고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장소에 대한 일시성의 시선을 유발하는 동시에, 매번 달라지는 새로운 공간을 끊임없이 욕망의 대상으로 치환시키는 장치로서 그림의 공간에 불려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선시대 문인화에 나오는 선비의 이상적인 서재나 사랑방을 기웃거리거나, 또는 그 시대 문인들의 이상적 기물 중 하나인 이국적인 파초의 푸른 잎이 자라는 뜰이나,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 또는 시원한 물이 가득한 실내 수영장으로 변한 방이나, 열주가 늘어서 있는 신전과 거기 딸린 신록의 너른 정원과 같은 곳에 이동해 있는 말은 그러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늘하고 복합적인 욕망의 그림자를 하나씩 투영해 낸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장소에 등장하는 말은 그러한 종류의 이상화되어 있는 공간들을 욕망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대개 도원경이나 아르카디아, 또는 에덴동산과 같은 이상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의 말이 등장하는 공간들은 기이하리만큼 싱싱한 푸르름으로 뒤덮이거나 거기에 원색의 꽃과 과일이 자리하고, 더러는 노랑, 핑크, 보랏빛 등이 주조를 이루는 백일몽과 같은 색채를 띠고 있는 아스라하게 아름다운 공간으로 뒤바뀌게 된다.
말이 등에 싣고 다니는 집들을 자세히 보면 다양한 주택의 양식과 공간이 혼재되어 있다. 때로는 성처럼 장중하게 보이는 석조건물 같은 것도 있고, 책거리 그림의 서가와 같이 이상화된 공간들도 있다. 동시대의 시공에서 서로 다른 맥락의 온갖 욕망의 목록이 뒤섞여 있는 이런 이미지들은 이상적인 주거시설이나 공간에 대한 현대 시민들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벽을 더욱 닿을 수 없이 높고 두터운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러기에 이러한 장면들은 끊임없는 이동과 소유의 욕망을 동기화하는 잠재적인 배경으로 작용한다.
이처럼 집을 등에 지고 떠도는 말이 찾아다니는 시대적으로 이상화된 집이나 이상적 공간에 대한 파노라마적 탐색을 통해 류지선의 회화 공간은 그러한 불가능한 공간에 대한 케렌시아나 오아시스에의 갈망과 같은, 기진한 현대인의 고단한 심리를 고요하고도 명징한 거울처럼 비춰낸다. 따라서, 그의 말이 나타내는 이동성은 단순히 더 나은 거주지나 안락한 쉼터를 찾아다니기 위한 유목민적인 이주의 문제만이 아니라, 현대문명이 초래한 근본적인 불안이 유발하는 세계 자체의 흔들리는 변동성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은유로서 작용한다. 더욱 근원적인 의미로는, 프란츠 마르크의 푸른 말이 순수자연을 추구하는 상징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처럼, 그가 그리는 말 역시 푸르고 싱싱한 공간으로서의 순수자연이나 신화적 공간과 같이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절실한 회귀의 욕구를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류지선 약력
서울대 미술대학 박사 졸업
전시
2023 움직이는 집(아트스텔라 창원갤러리 초대, 창원)
류지선 초대전(갤러리백희, 전주)
2022 걷다(아트스페이스 퀄리아 초대, 서울)
욕망의 전조(호암교수회관 초대 서울)
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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