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사진계의 거장, 육명심 사진가 별세 (93세)
마음으로 찍는 사진, 육명심 교수와의 하루
2025년 10월 15일, 우리나라 사진계의 거장, 육명심 교수가 별세하셨다. 향년 93세.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진계의 큰 별이 졌다. 필자는 10여 년 전 우연히 육교수님을 알게 되어 코로나 이전까지 10년 넘게 매월 모임을 함께 했던 분이셨다.
늦깎기로 사진공부를 하게 된 나는 우리나라 사진계의 대부라고도 할 수 있는 육명심 교수님을 알게 된 후 10년 넘게 매월 만났던 사적 모임(6인)에서 그분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인생의 대선배는 물론 사진계의 스승으로서 존경해왔었다. 그분은 늘 내게 아버지같이, 때로는 친구같이 온화하고 다정하게 대해주셨다.
육명심교수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금, 그 분과 함께 했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그 중 하루, 철원 갔던 날을 특히 잊을 수 없다.
2015.1.16(금), 날씨가 우중충했다. 일기예보에서는 비 또는 눈이 내릴 꺼라 했다. 육명심 사진가, 서정춘 시인과 철원에 가기로 한 날이다. 다행이 날씨가 춥지는 않아 걱정이 덜 됐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8시 버스를 타면 철원 동송터미널까지 2시간 10분쯤 걸린다. 이번 여행에서는 전부터 두분과 알고 지내는 정혜정 시인(화가, 사진가)도 함께 했다.
1975년 신구대 및 1981년 서울예술대학 사진학과를 창설한 한국 사진계의 대표적 거장 육명심 사진가는 한국의 대표문인 72명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문인의 초상>(2007)을 비롯, <장숭>, <검은 모살뜸)>, <백민> , 작품선집 <육명심>등의 작품집을 남겼으며, <세계사진가론>, <사진으로부터의 자유> 등 이론서와 자전적 산문집 <이것은 사진이다> 등도 펴냈다. 2014년 연말 티베트사진집을 낸 후 그 후에는 일상의 불교를 담으려 종종 절을 찾아 다니셨다.
필자는 당시 철새사진을 찍기 위해 철원에 자주 갔었는데 그 때 도피안사라는 절을 들른 적이 있다. 조그만 절이지만 아담하고 아름답운 절이다. 이 절에는 특히 철조비로사나불좌상이 유명하다. 국보 제63호로 등록된 신라 경문왕 때 만들어진 문화재이다. 육명심 사진가에게 그 절 얘기를 했더니 한 번 가보고싶다고 하셔서 철원 방문일정을 잡은 것이다.
육명심 사진가는 불교에 특히 관심과 조예가 깊으셨다. 아버지가 스님이셨기 때문일까? 본인도 어릴 적에는 스님이 되고자 한 적도 있다고 했다. 남편과 자식까지 떠나보내기 싫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그만 뒀다고 한다. 티벳 등 불교문화권국가를 10여 년간 돌아다닌 것도 육명심 사진가의 그런 종교관 및 정신세계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의 삶과 문화를 사진으로 담아 낸 작품집이 바로 2014년 말에 발간된 <육명심사진집-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다.
철원에 도착하여 먼저 도피안사로 직행했다. 절 분위기가 참으로 고즈넉했다. 필자도 이런 분위기의 사찰이 좋다. 육명심 사진가는 먼저 대적광전에서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고 절 전체를 휙 둘러보셨다. 그런데 이상하다. 사진을 찍고싶다고 이곳까지 오셨는데 아예 카메라를 꺼내기조차 않으신다. 그냥 산책하듯 절 여기저기 돌아보기만 하신다. 약수 한 잔 마시고 새가 하늘을 보듯 하늘을 올려다보시기도 한다. 혹시 절 분위기가 마음에 드시지않아서일까? 그런데 육명심 사진가는 절이 마음에 든다고 말씀하신다. 마음에 든다면 왜 사진을 찍지않을까?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 질문은 하지않았다. '사진계의 선승'으로 불리울 정도로 생각이 깊고 비범하신 분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절 분위기 만 보고 다음에 따로 날짜를 잡아 다시 찾아오시겠단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눈이 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살짝 던지신다.
육명심 사진가는 사진을 함부로 찍지않는 분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당시 경향신문 기자와의 인터뷰(2015.1.14일자 기사)에서 밝힌 그 일화 중 하나다.
1990년대 초반이었을 거다. 육명심과 그의 후배 사진가 황헌만의 경북 문경 장승 촬영길에 동행했다. 그랬는데 대사진가 육명심이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나타난 거였다. “하하. 이것도 필요없어. 눈으로 찍고 마음에 걸어두는 사진도 있는 법이지.” 그는 1박2일 동안 정말 한 장의 사진도 안 찍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선승’이란 말도 듣는다. 더 특별한 일화가 있다. 그가 1982년 당대 고승이었던 성철 스님 사진을 찍겠다고 무작정 해인사 백련암에 쳐들어갔다. 사진은 커녕 3000배를 하지 않으면 누구도 만나주지 않던 성철 스님이 웬일인지 그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사진은 뭐 하러 찍을라카나?” “스님, 만약 부처님 생전에 사진술이 있었더라면 세상의 불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스님이 씨익 웃더란다. “그럼 한번 찍어봐라.” 여기서 그의 대답이 예상밖이다. “안되겠습니다.” 당시 신장이 좋지 않던 성철 스님의 눈두덩이가 좀 부어 있었다. “그렇다고 사진을 안 찍어?” “예. 나중에 다시 와서 찍겠습니다.” 그 후 다른 사진작가가 먼저 성철 스님의 사진을 찍은 걸 알고 다행으로 여겼다고 한다. “카메라로 찍는 사진이 아니고 내 눈으로, 마음으로 찍은 사진, 정말 천하무구의 사진 한 방을 남겼지.”
육명심 사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기인같은 부분도 있다. 그의 자전적 산문집인 <육명심-이것은 사진이다>를 읽어보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검은 모살뜸>에 관하여 설명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지금도 나는 내 방에서 장승 한 쌍하고 함께 지낸다. 우리 식구들이 귀신 같다고 하면서 질색하며 날뛰고 기피하는 그것하고 방을 함께 쓴지 어느덧 20년 가까이 된다. 골동가게에 팔려 나온 장승을 우여곡절 끝에 내가 맡게 되어 달리 모실 길이 없어 집 안으로 끌어들였더니 식구들 모두가 총궐기했다. 아파트 공간에 장승이 있으면 밤에 무서워서 거동하기도 불편하고 영물스러운 것이 있으면 한낮에도 기분이 언짢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장승하고 나하고 한 방을 쓴다. 내 방에는 장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해골도 있고 인골피리도 있었다. 모두 티벳 촬영여행에 가서 비싼 돈 주고 구해 온 것들이다. 사람들이 오면 이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데 밤에 기분이 괜찮은가 하고 묻는 이들이 많다"
하아, 허긴 그렇지. 위대한 예술가 중 기인이 아닌 사람이 있었던가? 화가 반 고흐도 그렇고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도 그랬었지. 걸레스님 화가 중광, 시인 천상병은 안그랬나?
그의 작품세계를 요약해 보면, 1960-70년대 원로사진가들의 대부분이 리얼리즘 일색의 작품활동을 보여온데 비해 육명심 사진가는 문학 등에서 말하는 소위 '낮설게 하기'의 예술적 방법을 한국 사진계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현대사진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1960년대 후반에 펴낸 그의 작품집 <인상> 연작 등을 보면 그가 다른 사진가들보다 얼마나 앞서서 한국 현대사진을 이끌어왔는가를 알 수 있으며, 실로 경탄할 만한 사진 선각자임을 알고 깜짝 놀란다. 예를 들어 <영상사진(1966-1978)> 작품집을 보면 화면들의 한가운데가 대부분 텅 비어 있다. 우측 하단 구석에 죽은 개 한마리가 누워있고 화면 상단 끝에 지나가는 사람 발목만 보일락말락 조그맣게 보여줄 뿐 화면 가운데는 아무 것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사진도 있다. 인간들의 관심 밖에서 혼자 죽어가고 있는 개를 표현한 작품이다.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시점에서 봐도 과연 이것이 사진인가 하고 의구심이 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1966년 대학교 시절의 스승이었던 박두진 선생의 사진을 찍는 것을 계기로 시작된 문인과 화가, 국악인, 연극인 등의 초상을 담은 <예술가의 초상> 연작은 사실상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육명심이 사진을 통해 예술가들의 얼굴을 담는데 그치지않고 그들이 지닌 생각과 태도, 삶이 드러나는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다른 사진가들처럼 예술가들의 완벽한 순간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서정주 시인의 사진처럼 쭈그리고 앉거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거나, 앞섶을 풀어헤치고 화면을 바라보는 예술가들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만난 예술가들에게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았다. 몇시간이고 대화를 하며 그들과 친해지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사진가가 관찰자로 남아 얼굴을 묘사하는 표면적인 사진이 아닌 작가들과의 소통과 교감을 바탕으로 한 삶과 정서가 담긴 사진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게 ‘우리것 삼부작’으로 묶을 수 있는 <백민>, <장승>, <검은 모살뜸> 연작을 거치면서 그의 사진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해 나간다. 백민 연작 중에서 최고는 단연 강원도 강릉의 무당사진이다. 육명심 역시 이 작품을 최고로 꼽고 있다. 이 무당의 이름은 박용녀로, 동해안 별신굿의 대표적인 무당이다. 1983년 그가 강릉단오제 때 대관령 산신당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 어떤 무당보다도 신령스러운 신기(神氣)가 강하게 발생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35밀리 렌즈로 눈을 집중적으로 강조해서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똑바로 쳐다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날카롭게 묘사된 무당의 눈이 빛난다.
제주도에서는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려 바닷가 검은 모래들이 한껏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철 한때, 그 속에 몸을 파묻고 찜질을 한다. 검은 모래찜질은 제주도 사투리로 ‘검은 모살뜸’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전통적 민간요법이다. 검은 모살뜸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다. 우선 찜질하기 위해 파놓은 구덩이가 관을 안치하려는 묘의 밑바닥과 같다. 흙속에 파묻혀서 얼굴만 빼꼼히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은 죽은 송장을 보는 듯 하다. 육명심은 “이런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풍기는 대상이 유난히도 내 마을을 사로잡았다”고 말한다.
육명심 사진가는 자신을 '선승'이라고 부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승'은 무슨? 선객(仙客)이라면 모를까..." 선승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는 말씀. 매우 겸손한 반응이시다. 코로나 이전까지만 해도 육명심 교수는 장승과 함께 한 방에서 자고, 해골 및 인골피리와 함께 매일 서재에서 참선을 한다고 확인해주신 적이 있다. 그 후 별세하실 때까지도 장승과 한 방을 썼는지는 여쭤보지못했다.
강남구 역삼동의 오피스텔 10층에 있었던 그의 서재 겸 작업실은 그대로 하나의 선방이었다. 나무 바닥 한가운데 참선용 좌복이 놓여 있었지. 그는 당시 밤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3시에 일어나신다고 말씀하셨다. 1시간 동안 참선을 하고 40분간 산책을 하셨다고 한다. 오전에 2시간을 더 수행하셨다. 산중의 스님들과 똑같이 15년을 꼬박 지켜온 일과라고 말씀하셨다. 별세하시기전 몇년간은 거동이 불편하여 가급적 외출은 삼가셨다. 육명심 교수님과 이승에서의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10년 넘게 매월 만났던 6인모임 멤버들과 망우공원 한용운 선생 묘소에서 함께 찍은 사진 올려본다.(우로부터 윤길수장서가, 육명심교수, 서정춘시인, 이규진도예연구가, 김종태변호사, 임윤식시인) (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