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y work docent: 성 개방의 쓰나미, 문화 충돌
(누드작품들은 한국사진방송-보물창고에 넣어 둡니다.)
자를 찬 경찰
‘M의 초상’ 누드사진집 허가 이후 우리나라에도 성개방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지하철 1호선이 막 개통되던 시절, 객차 안에서는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풍경들이 펼쳐졌다. 젊은 연인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신문을 들고 얼굴을 가렸고,
어떤 사람은 신문을 살짝 내려 구경을 더 했다.
시대의 변화는 대학로에서 가장 먼저 터졌다.
가수 윤복희, 허벅지가 허옇게 드러나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대학로를 활보하자 세상이 또 한 번 발칵 뒤집혔다.
언론은 연일 떠들어댔다.
“풍기 문란!”
“청소년 정서 위협!”
“세상 말세다…”
그러자 경찰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 시절 경찰들은 허리에 권총 대신 자를 차고 다녔다.
“잠깐! 거기 아가씨!”
경찰이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을 불러세웠다.
그리고는 허리에서 번쩍 자를 꺼냈다.
척.
“무릎 위… 21센티.”
경찰의 얼굴이 굳어졌다.
“구속입니다.”
심지어 경찰은 가위까지 들고 다녔다.
귀를 덮으면 장발 단속 대상.
“학생, 머리 좀 봅시다.” 싹둑.
“이제 애국적인 머리가 됐네.”
문제는 우리의 작가였다.
그 시절 지하철을 타는 건 교통수단 이용이 아니라 일종의 신원 확인 행사였다. 들어갈 때 검문, 나올 때 또 검문. 국가가 국민을 얼마나 아꼈는지 매번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주민등록증을 목에 걸고 다녔다. 신분증이 아니라 거의 출입증이었다.
지하철 입구 맞은편에서 전경 하나가 손가락을 까딱까딱했다. 사람을 부르는 손짓이라기보다 개 부르는 손짓이었다. 하필이면 우리 작가였다.
“너 몇 살이야? 전방에 가봤어? 민정 경찰이 뭔지 알아? 전기도 없는 최전방에서 개고생해 봤어? 검문 그래 좋아. 근데 손가락으로 사람을 불러? 내가 네 따까리냐?”
잠깐 공기가 멈췄다. 작가 말도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전방에 있었다.
그 시절 최전방은 전기가 없었다. 밤이 되면 호야불 켜고 살았다. 그 당시 군대의 부정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성실하게 흘러 바구미가 구멍 낸 쌀과 보리마저 늘 부족해 사병들은 배를 곯았다. 취사할 석유도 없어 생나무를 찍어 밥을 지어야 했다. 군대는 나무도 열을 맞춰야 되었다. 부대원들은 10km를 행진하여 팔뚝 굵기의 나무들만 골라 닙본도로 찍어 잔가지를 쳐내고 칡넝쿨로 다발과 멜빵을 만들어 줄줄이 끌고 2열 종대 줄 맞춰 귀대하는 것이 주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옷? 그건 옷이 아니었다.
유화염료 군복 사건으로 결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햇볕에 바래 백의민족의 상징도 아닌데 허옇게 변색 되고 때에 절어 지구촌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색을 만들어 냈다.
디자인? 예술 그 자체였다.
한 번 기웠다. 또 기웠다. 심지어 통일화도 누더기로 깁고 또 기웠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생나무 다발을 끌고 행진하는 병사들의 패션쇼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이색적인 예술 아우라로 기록돼야 마땅했다. 물론 주로 최전방 민통선이나 인근 부대였기에 민간에 알려질 염려는 0이다. 휴가나 외출할 때는 일기장 피복이라는 혼방이나 사지의 군복을 다림질하고 군화도 개미가 올라갔다가 뇌진탕으로 죽을 만큼 광을 내고 나왔으니 귀한 집 자식을 군대에 상납한 부모들은 알 턱이 없었다.
그 시절 군대에서 헐벗고 배고픈 것보다 10배나 열 받는 건 따로 있었다.
3년을 꼬박 나라에 충성했는데 상병제대였다.
병장 진급은 장교가 별 다는 것보다 어려웠다. 부대 전체에 1년에 병장티오가 겨우 두 개였다. 국가가 병사들의 병장 진급을 멸종 위기종처럼 보호했기에 월남 참전유공자 정도나 아니면 제2땅굴 발견으로 훈장 정도 받아야 병장 진급이 가능할 정도였다. 로또 맞은 것보다 더 큰 행운을 누린 병장이 바로 우리 작가였다. 그 영광스러운 병장 진급 사실이 주민등록증에 찍혀 있었다. (지금 주민증은 군역이 빠짐)
전경이 주민증을 받아 들었다.
한참 보더니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마치 길거리에서 갑자기 야생 호랑이의 신분증을 본 사람처럼.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작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젠장… 이건 이겨도 손해다.’
나라를 위해 3년을 바쳤다는 자부심과, 그 자부심을 길거리 검문에서 써먹으면 괜히 더 피곤해진다는 현실. 군대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곳에서 자존심을 꺼내지 않는 법이라는 것을 그새 또 까먹고 말았던 것이다.
“귀를 덮었네.”
“예술가라서....”
“유치장에서 예술 많이 하시던지”
결국 경찰서 유치장을 하룻밤 꿇었다.
노랑머리도 문제였다. “체제의 반항으로 보았다. 영화 ‘노랑머리’는 히트를 기록했다.
“아… 이게 바로 문화 충돌이라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