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차 전기본 전면 재설계·수송전환·탈플라스틱 등 근본적인 체질 개선 시급
그린피스는 트럼프-네타냐후의 대(對)이란 전쟁으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한다. 이란 정권의 국민에 대한 폭압에도 단연코 반대한다. 그러나 이를 이유로 전쟁을 통한 또 다른 시민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란의 민간인은 물론, 걸프 지역 주민들이 겪고 있는 인적 피해와 일상의 파괴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 파티 비롤 사무총장은 현 상황이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위기를 합친 것보다 심각하다"고 경고했다. 해협 봉쇄로 걸프 지역의 식량 수입이 차단되고, 에너지 시설 피격으로 담수 공급까지 위협받고 있다. 핵시설과 원자력 발전소, 유조선, 정유시설 등에 대한 공격은 토양, 해양 및 대기 환경에 치명적이고 장기적인 피해를 남긴다. 그린피스는 즉각적인 휴전과 국제법에 기반한 평화적 해결을 촉구한다. 민간인의 생명과 안전, 민간 인프라의 보호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전쟁의 여파가 한국 경제의 심장부를 직격하고 있다. 지난 24일 정부는 원유 관련 자원안보위기 '주의' 경보에 따른 대응체계를 가동하며 석탄발전 운전 제약(80%)을 완화하고, 올해 6월 예정된 석탄발전소 3기(하동 1호기, 보령 5호기, 태안 2호기)의 폐쇄 일정을 재검토하기로 했다. 같은 날, 카타르에너지가 한국을 포함한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과의 LNG 장기 공급 계약에 대해 공식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다. 앞서 18-19일 카타르에너지는 이란의 미사일 공습으로 인한 LNG생산시설의 복구에 3~5년이 소요될 것이라 밝혔다. 계약이 있어도 물리적으로 공급이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위기는 전력에 그치지 않는다. 여수 국가산업단지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나프타 공급이 끊기며 LG화학, 여천NCC 등 석유화학 공장들이 가동을 멈추거나 최소화했다. 90%에 육박하던 가동률은 60%대로 줄었다. 해협 하나가 막히자 전력, 석유화학, 제조업, 수송이 동시에 흔들린다. 이것은 개별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화석연료에 기반한 경제 구조 자체의 문제다.
정부는 카타르 LNG가 전체 수입의 약 14%이며 대체 도입선 확보로 수급 관리가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다. 공급선을 미국이나 호주로 바꾸면 물리적 단절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LNG 가격은 글로벌 시장에서 결정되므로, 어디서 사든 그 가격 충격은 그대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한 지정학적 리스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도, 지금도 동일하게 경험하고 있다.
러·우 전쟁의 여파로 국제 LNG 가격과 전력도매가격(SMP)이 급등했지만, 정부는 물가 안정을 이유로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억제했다. 요금은 오르지 않았지만 비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한전은 2022년 한해에만 약 33조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누적 총부채는 현재 206조 원에 달한다. 가스공사 역시 누적된 민수용(가정·상업용 도시가스) 미수금이 약 14조 원에 이른다. 부담하지 않은 비용은 공기업의 부채가 되었고 그 부채는 결국 미래의 요금 인상이나 세금으로 돌아올 것이다.
유가 급등은 수송 부문에서도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지난 13일부터 석유제품 최고가격제를 시행해 정유사의 공급 가격에 상한을 뒀다. 정유사가 상한선 이하로 공급하면서 발생하는 손실은 국가 재정으로 보전하는 구조다. 또한 정부는 2011년 한시적으로 도입한 유류세 인하 조치를 20차례 연장했으며, 이번에도 추가 연장과 인하율 확대를 발표했다. 문제는 이러한 재정 지원이 석유 의존적 수송 시스템을 고착화시켜 왔다는 점이다. 내연기관차 유지 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구조에서 전기차 전환의 경제적 유인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전환이 지연된 결과, 유가 위기가 올 때마다 다시 유류세를 깎는 것 외에 대안이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이 지연되어 석탄을 다시 가동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과 닮은꼴이다.
석유화학 원료 위기는 플라스틱 산업과도 직결된다. 나프타에서 에틸렌, 플라스틱으로 이어지는 공급망의 불안정은 비닐 대란을 넘어 전반적인 물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진다. 석유 기반 생산 구조에 비정상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한, 외부 충격에 따른 산업 전반, 민생 경제의 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나프타 수출 제한 등 긴급 조치를 취하고 있으나 임시 방편일 뿐이다.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자원이 선순환하는 ‘순환경제’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수립 중인 ‘탈플라스틱 종합대책’은 여전히 사후 폐기물 관리에만 치중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석유 의존을 끊어내야 할 자원 안보 위기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린피스 서울사무소는 이번 위기를 계기로 한국 정부에 다음을 요구한다
첫째,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재생에너지 확대를 에너지 안보 핵심 전략으로 반영해야 한다. 재생에너지와 ESS 확대는 외부 충격에 강건한 전력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현실적인 경로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설비를 100GW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12차 전기본은 이 목표를 구체적 이행 경로로 담되, 석탄 퇴출분을 LNG로 대체하는 방식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카타르의 3~5년 불가항력 선언은 LNG 장기 계약과 인프라 투자가 극단적 리스크에 노출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수입 화석 연료 의존 구조를 유지하는 한, 같은 위기는 반복된다. 아울러 이번 위기를 계기로 완화된 석탄발전 운전 제약과 발전소 폐쇄 일정 재검토는 한시적 조치임을 명확히 해야한다. COP30에서 국제 사회에 약속한 탈석탄 약속이 비상 조치라는 이름으로 후퇴해서는 안 된다.
둘째, 수송 부문의 화석연료 의존을 구조적으로 줄여야 한다. 유류세 인하의 물가 안정 및 민생 지원 효과는 불확실하다. 내연기관차에 대한 재정 지원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그 재원을 전기차 구매 보조금 확대, 충전 인프라 구축, 대중교통 및 자전거 인프라 활성화에 재배분해야 한다. 화석연료를 보조하는 데 쓰이는 재정을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는 데 써야 유가 변동에 대한 수송 부문의 구조적 취약성을 줄일 수 있다.
셋째, 탈플라스틱 정책을 자원 안보 관점에서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나프타 공급 차질이 플라스틱 가격 급등으로 직결되는 현실은 석유 기반 생산 구조 자체가 상시적인 리스크임을 입증한다. 현재 수립 중인 ‘탈플라스틱 종합대책’과 ‘제1차 순환경제 기본계획’은 단순한 관리 계획을 넘어 국가적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석유 기반 플라스틱 생산 감축과 재사용 의무화를 포함한 실효적 대책이 명시돼야 한다. 근본적인 체질 개선만이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건한 경제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넷째, 취약 계층을 직접 보호하기 위한 대책이 조속히 마련되어야 한다. 이번 위기는 에너지 요금에 그치지 않는다. 난방비, 주유비, 생활용품과 식료품 가격이 동시에 오르는 상황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는 것은 저소득 가구다. 화석연료 소비 보조는 생활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고, 오히려 역진성과 사각지대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가구마다 위기의 모습이 다른 만큼, 특정 연료 소비를 보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가계에 직접 도달하는 소득 지원이 더 실효적이다. 전방위적인 민생 위기의 순간, 민생지원금 등 시민의 삶을 직접 보조할 수 있는 수단 위주로 추경 논의가 진행되어야 한다.
다섯째, 화석연료 의존의 실제 비용을 국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LNG 추가 도입 비용, KOGAS·KEPCO 재무 영향, 가스요금 인상 전망, LNG 인프라의 좌초자산 리스크, 석유화학·반도체 산업 피해 규모 등을 종합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국민이 화석연료 의존의 비용과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비교할 수 있을 때, 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가능하다.
이번 위기가 드러낸 것은 명확하다. 해협이 봉쇄되자 전기요금 불안이 커지고, 석유화학 공장이 멈추고, 플라스틱 가격이 치솟고, 주유비가 뛴다. 에너지에서 시작된 충격이 산업 전체를 관통하여 가정의 난방비와 장바구니 물가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화석연료 의존 경제의 현실이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재생에너지는 전쟁이나 해상 봉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전기차와 자전거는 국제 유가와 무관하게 달린다. 재사용 시스템은 나프타 가격에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과 햇빛에는 불가항력 선언이 없다.
정부는 이번 위기를 관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음 위기가 오지 않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