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웅필 ‘어떤(SOME)’ 갤러리 나우

입력 2026년04월18일 08시19분 김가중 조회수 39


 

변 웅 필 | SOMEONE, 113x147cm, varnished oil on canvas, 2026

전시 제목 : 어떤(SOME)

전시 기간 : 2026.05.06()-05.30()

관람 시간 : ~토요일 10am~6pm

전시 장소 : 갤러리 나우 (서울시 강남구 언주로 15216)

문 의 : T. 02-725-2930, E-mail. gallerynow@hanmail.net

 

[서문]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이상하게 또렷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굳이 이름을 붙이기엔 사소하고, 설명하려 들면 이미 충분히 지나가버린 것들. 변웅필의 회화는 늘 그 언저리를 맴도는 듯하다.

그의 화면에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끝내 특정되지 않는다. 얼굴은 분명하지만 정체는 흐릿하고, 표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감정이 또렷하게 읽히는 것도 아니다. 오래도록 자화상을 그려왔던 작가는, 결국 자신을 지운 자리에서 더 많은 불특정한 얼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낯선데 이상하게 익숙하고, 누구도 아닌데 어딘가 우리를 닮아 있는 얼굴들. 작가는 어쩌면 자신을 지워가면서 이런 얼굴들에 가까워졌는지도 모른다.

이 얼굴들은 굳이 무엇을 말하지 않는다. 화면 속 미소도 마찬가지다. 분명 웃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진심인지, 습관인지, 혹은 그저 그려진 표정일 뿐인지, 보고 있으면 알 것도 같다가 금세 멀어진다. 어쩌면 그 알 수 없음이 오히려 우리를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걸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그 머묾은 인물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물과 풍경,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놓인 것들이 한 화면 안에 함께 존재한다. 서로를 구분하기보다 그냥 같이 있는 상태. 작가는 그것을 어떤(Some)’이라고 부른다. 분명 보이지만 쉽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들, 스쳐 지나가는 것 같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 감각들, 생각으로 정리되기 전에 먼저 다가오는 순간들이다.

그리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복되는 붓질 속에서 조금씩 어긋나는 순간들을 그냥 받아들이고, 단정한 선과 익숙한 색 사이에 생기는 미묘한 차이들, 그 틈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어떤 것들을 기다린다. 미리 정해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또렷하고, 설명되지 않기에 더 오래 남는다.

변웅필의 회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이해하고 규정짓기를 바라지 않는다. 대신 잠시 머물러서 바라보기를 권한다. 의미를 찾기보다, 이미 지나가고 있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시간,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고, 기억으로 남지 않아도 충분한 순간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날들이 결국 더 오래 남는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금 우리는, 어떤(Some)’ 장면 앞에 서 있다.

 

-갤러리나우 송지원 큐레이터

 

[평론]

 

얼굴 아닌 얼굴, 변웅필 회화의 익명적 존재론

 

프롤로그

어떤 얼굴은 끝내 기억되지 않지만, 뇌리를 분명히 스치고 지나간다. 붙잡으려는 순간 미끄러지고 설명하려는 순간 더 멀어지는 이 얼굴은 변웅필의 회화가 머무는 자리이다. 화면 위 형상들은 특정한 인물을 지시하지 않은 채 누구도 아닌 동시에 누구나 될 수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 얼굴들은 재현된 초상이 아니라 이름이 제거된 상태이며, 설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존재의 흔적으로 작동한다. 미술사에서 인물화는 오랫동안 닮음개성의 문제였다. 르네상스 초상화가 외형적 유사성과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면, 19세기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는 개인의 심리와 순간의 감각을 포착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피카소는 얼굴을 기하학적으로 해체했고, 베이컨은 형체를 왜곡하며 내면의 폭력을 드러냈다. 그러나 변웅필이 수행하는 해체는 이와는 다른 방향에 놓인다. 작가는 얼굴을 부수거나 비틀지 않는다. 오히려 온전한 형식을 유지한 채, 그 내부를 조용히 비운다. 이름도, 표정도, 이야기조차 제거된 채 거기 있음으로 남겨진 얼굴. 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흐릿한 초상이 정체성을 유예하는 방식과도 다르다. 리히터가 사진의 지표성과 회화적 모호성 사이에서 긴장을 생성한다면, 변웅필은 그 긴장 자체를 지워내고 이름 없이 존재할 수 있는평온한 상태로 나아간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작업은 인물화의 역사 속에서 초상 이후의 초상이라는 독자적인 위치를 점한다.

작가의 작업은 처음부터 정체성을 구축하기보다 제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으며, 독일 체류 시기 자화상에서 출발한 이 흐름은 외형적 요소를 지우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얼굴을 개인이 아닌 조건으로 환원시켰다. 이후 ‘SOMEONE’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특정 인물이 아닌 비특정적 존재를 가리키는 구조로 정착되고, 최근 전시 아무렇지 않은 날들에 이르면 이 구조는 ‘SOMETHING’으로 확장되며 인물과 사물의 구분 자체가 해체되는 단계에 도달한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소재의 확장이 아니라 회화가 인간 중심의 재현에서 벗어나 존재 일반의 상태를 다루는 방식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회화는 존재를 설명하기보다, 설명 이전의 상태로 남겨진 존재의 흔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평면의 구조, 선을 비움으로써 형상을 그리다

변웅필의 회화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평면성이다. 그의 화면은 깊이를 제거하고 공간을 압축하며 원근을 배제하고 대상의 입체성을 지운 채 색면과 경계만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선의 방식이다. 작가의 선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남겨진 것으로, 색과 색 사이를 비워두는 방식으로 형성되며 이는 선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색이 형태를 드러내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방식은 단순한 시각적 효과가 아니라 극도의 통제와 반복을 요구하는 수행적 과정 위에서 형성된다. 색은 한 번의 붓질로 완성되고 붓 자국은 허용되지 않으며 표면은 균질하게 유지되고, 작은 오차조차 전체 작업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이 과정은 회화에서 감정의 흔적을 제거하고 화면을 철저히 비개성적인 상태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중요한 전환이 발생한다. 표현이 제거될수록 회화는 감정을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존재가 놓이는 조건을 드러내는 장으로 이동하며, 깊이를 상실한 평면은 세계를 재현하는 공간이 아니라 존재들이 동시에 머무는 장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러한 평면성은 세계를 대상화된 구조로 이해하기보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태로 이해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으며,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가 세계를 사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살아지는 장으로 이해했던 관점은 이 회화의 감각을 해석하는 데 유효하다. 다만 변웅필의 경우, 살아있음은 감각의 흔적을 강조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제거함으로써 확보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성립한다.

 

얼굴에서 구조로, 초상 이후의 회화

변웅필의 회화는 초상화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초상의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얼굴은 더 이상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며 눈··입이 제거된 형상은 특정 인물을 지시하지 않고, 인물은 이야기의 주체가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로 남는다. 이러한 구조는 ‘SOMEONE’에서 ‘SOMETHING’으로 확장되며 더욱 분명해진다. 인물과 사물은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어지고 모두가 색과 형태를 담는 그릇으로 기능하며, 화면 속에서 사과와 잎, 인물과 대상은 동일한 밀도로 놓인다. 이때 회화는 더 이상 인물을 재현하는 장르가 아니라 존재를 배치하는 구조로 전환되며, 초상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관계 없는 존재들의 병치가 남는다. 이러한 방식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 18901964)의 회화와 비교 속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모란디가 병과 사물을 통해 대상의 의미를 제거하고 관계와 균형을 탐구했다면, 변웅필은 인간의 얼굴을 그 자리에 위치시킨다. 즉 모란디가 사물을 사물로 남겨둔 채 관계를 문제 삼았다면, 변웅필은 인간 형식 자체를 사물의 자리로 이동시킴으로써 인격성(personhood)의 경계를 흔든다. 얼굴이면서 동시에 사물처럼 중립화된 그 낯섦, 바로 그 긴장이 그의 회화가 생성하는 핵심적 지점이다. 이때 회화는 더 이상 누구를 그리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를 놓는가의 문제로 이동한다. 이러한 지점은 Ludwig Wittgenstein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라고 했을 때의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 변웅필의 얼굴들은 설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말해질 수 없는 영역으로 스스로를 옮겨놓음으로써 존재를 드러낸다.

 

몰개성의 형식, 동시대적 존재의 표상

변웅필의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몰개성이다. 인물은 특정한 개성을 갖지 않으며 감정은 최소화되고 의미는 유보되는데, 이 몰개성은 결핍이 아니라 동시대 조건에 대한 명확한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체성이 과잉 생산되고 이미지가 끊임없이 소비되는 환경 속에서, 작가의 회화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존재를 드러낸다. 의미를 제거한 자리에서 회화는 다시 존재의 문제로 돌아가며,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아도 좋다고 말하는 태도는 회피가 아니라 회화의 기능을 재정의하는 선언으로 읽힌다. 작가의 화면에서 인물과 사물은 구별되지 않고 모두 동일한 밀도로 놓이며 위계 없이 공존하고, ‘아무렇지 않음은 무감각이 아니라 판단과 비교가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때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지 않고 존재를 드러내며, 관람자는 해석이 아니라 감각의 층위에서 화면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가 사물을 의미의 매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이해했던 방식과 맞닿아 있으며, 변웅필의 회화는 그 사유를 인간의 얼굴까지 확장함으로써 더욱 급진적인 차원으로 밀어 올린다. 몰개성은 이 지점에서 동시대적 표상이 된다. 개성을 제거한 자리에서 회화는 개인을 넘어선 존재의 상태를 드러내고, 의미를 유보한 화면은 오히려 더 강하게 현재의 감각을 호출한다.

 

에필로그

변웅필의 회화는 결론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주장으로 수렴되지 않으며 특정한 의미로 고정되지 않는다. 대신 하나의 상태로 남는다. 화면은 완성된 결과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의 일부이며, 특별하지 않은 순간들이 겹쳐 만들어진 시간의 층이다. 그 얼굴들은 말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문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얼굴은 더 이상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가 아니라 존재가 머무는 자리이며, 회화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는 장치가 아니라 존재를 드러내는 장이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하나의 감각과 마주하게 된다. 이름을 갖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감각, 설명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감각. 이 감각은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무심(無心)’의 상태와 닿아 있다. 무엇을 붙잡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사물과 더 깊이 접속하는 상태, 판단과 분별 이전의 자리에서 존재를 받아들이는 태도. 이때 존재는 규정되기보다 열려 있으며, 그 열림은 극단으로 치닫지 않고 스스로 균형을 이루는 중용(中庸)의 상태로 이어진다.

변웅필의 회화는 바로 그 사이에서 작동한다. 규정과 비규정, 의미와 무의미, 인물과 사물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 자리에서, 존재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그것은 완결된 정체성이 아니라 계속해서 열려 있는 상태이며, 우리가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어떤 삶의 형식이다. 그렇기에 이 회화는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존재가 여전히 가능성으로 남아 있는 자리 자체를 보여준다.

- 안현정(미술평론가, 예술철학박사)

 

[작가노트]

 

 

강화도에서 강아지 동구와 함께 산다. 아침이면 동구가 먼저 바깥 공기를 맡고, 나는 그 뒤를 따른다. 별다른 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상하게도 사소한 것들이 또렷해진다. 손에 쥐어지는 과일의 무게, 빛을 머금은 잎의 색, 이유 없이 머물러 있는 얼굴. 나는 그 장면들이 사라지기 전에, 가능한 한 무감한 상태로 기억에 담아둔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어떤(Some)”이다. 분명하지만 붙잡히지 않는 것들, 굳이 이름을 정하지 않아도 충분한 상태. 나에게 그것들은 설명 이전의 감각에 가깝다. 예전에는 사람의 형상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사물과 구분 없이 한 자리에서 머문다. 구별하기보다 함께 놓이는 쪽에 가깝다.

 

그리는 일은 특별한 목적을 향하지 않는다. 다만 단아한 선이 생기고, 익숙한 색이 겹치고, 편안한 형태가 남는다. 화면 위의 것들은 무엇을 말하려 하기보다, 그저 존재하는 쪽을 택한다. 동구가 햇빛 아래 아무 이유 없이 누워 있는 것처럼, 충분히 그 자체로 머무는 상태.

 

나는 이 시간을 논다고 생각한다. 규칙은 있지만 이유는 크지 않다. 반복되는 붓질과 제한된 선택들 속에서, 조금씩 어긋나고 쌓이는 감각들. 그렇게 길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다시 이어진다.

 

이 전시는 어떤 결론이 아니라, 흘러가는 중간의 한 장면이다. 특별히 기억되지 않아도 괜찮은 순간들, 그러나 분명히 지나온 시간들. “어떤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여기 잠시 머문다.

 

-26.03.20 변 웅 필

 

[약력]

 

변웅필 BYEN UNG-PIL (b.1970)

 

학력

1989-96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서양화)

1997-05 독일 뮌스터미술대학 석사(순수미술)

2005-06 Prof. Guillaume Bijl 마이스터 과정

 

개인전

2026 ‘어떤(SOME)’ 갤러리나우, 서울

2025 ‘SOMEONE’ 초이앤초이 갤러리+그레그 포드고스키 컨템포러리 아트, 니옹, 스위스

아무렇지 않은 날들호리 아트스페이스. 서울

2024 ‘SOMEONE’ 초이앤초이 갤러리. 쾰른, 독일

2021 ‘SOMEONE’ 호리 아트스페이스. 서울

2018 ’SOMEONE’ 아리랑 갤러리. 부산

2017 ‘小說의 변, 웅필- 가로 본능의 초상갤러리 조은. 서울

2014 ‘옥림리 23-1’ UNC갤러리. 서울

2013 ‘한 사람갤러리 현대 윈도우. 서울

2012 ‘한 사람아리랑 갤러리. 부산

변웅필프로젝트 카페우민. 청주

2009 ‘한 사람으로서의 자화상 1 & 1/4’ 갤러리 현대. 서울

2007 ‘설레임’ DO ART 갤러리. 서울

2006 ‘얼굴이 그리는 풍경갤러리 잔다리. 서울

2005 ‘페이스 투 페이스아트-이조토페 갤러리. 도르트문트. 독일

한사람으로서의 자화상플라스-마 갤러리. 뮬하임 안 데어 루어. 독일

2004 ‘변웅필 개인전짭아트 갤러리. 바렌도르프. 독일

'두 사람'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 행정대법원. 뮌스터. 독일

변웅필 개인전항겔라 미술관. 상트아우구스트-항겔라. 독일

2003 ‘너 나 그리고 우리미칸스키박사 병원. 렉켄. 독일

두 사람- 쇼윈도우베베르카 파빌론. 뮌스터. 독일

 

단체전

2025 ‘Invisible Someone'- 변웅필 박보선 2인전. 갤러리 조은. 서울

2024 ‘IS THERE SOMEONE?’ 갤러리 프랑세즈. 뮌헨. 독일

이상적 동행정읍시립미술관. 정읍

해피 호리 데이호리 아트스페이스. 서울

2023 ‘베를린에서 서울로: 지평선 넘어초이앤초이갤러리, 서울

2022 ‘그림의 탄생한가람 미술관. 서울

시적 소장품서울 시립미술관. 서울

2021 ‘남해를 꿈꾸고 즐기다스페이스 미조. 남해

2020 ‘앙상블 인 한남 ll’ 갤러리 조은. 서울

2019 ’15C 철화 NEW’ 아트센터 쿠. 대전

2018 ‘아트엘리제갤러리 조은. 파리. 프랑스

’START art fair’ 사치갤러리. 런던. 영국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소장품 기획전강릉아트센터. 강릉

2017 ‘이것이 두폭화이다작은미술관. 정선

회화에서, 회화로시안미술관. 영천

카페 소사이어티서울 미술관. 서울

‘100 앨범(Albums) 100 아티스트(Artists)’ 에비뉴엘 아트홀 . 서울

2016 ‘내일을 위한 한국 현대미술의 다색화 2030’ DDP. 서울

2015 <SeMA 예술가 길드 아트페어> SeMA shot : 공허한 제국.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2015 OCEANUS K-ART-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 오세아누스 아트홀. 부산

2014 ‘강정 숨결 녹색수원시미술전시관. 수원

한국의 초상미술-기억을 넘어서전북도립미술관. 완주

가족사랑양평 군립미술관. 양평

2013 ‘한국 현대 회화 33강동아트센터. 서울

‘AMMA UMMA’ 주인도 한국 문화원. 인도

바람난 미술서울특별시 시민청. 서울

2012 ‘15회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 방글라데시 2012’ 방글라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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