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투박한 그만의 페인팅 퍼포먼스
현란한 색채미학 페인팅누드퍼포먼스는 언제나 사람을 흥분하게 한다. 시신경을 가진 동물 중에서도 컬러를 100% 다 인지하는 동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한다. 인간은 그중에서도 아주 미묘한 색깔까지 인지하는 매우 발달한 시각 시스템을 가진 생명체다. 그래서 예술은 색을 배제하곤 존재하기 어렵다. 아니 색이 어쩌면 예술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 작가의 작업은 정형화된 틀을 깨부수는 데서 오는 ‘날 것 그대로’의 에너지가 핵심이다. 정교한 테크닉보다 '무식하게 들이붓는' 행위 자체가 보는 이의 본능을 자극하고, 억눌린 카타르시스를 터뜨려주는 것, 완벽하게 정돈된 미학보다 때로는 거칠고 투박한 파격이 인간의 시신경과 감정을 더 강렬하게 흔드는 카리스마는 역설의 방식이다. 논란과 발표의 어려움은 아마도 그 에너지가 시대를 앞서가거나, 기존의 관습이 감당하기엔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 아닐까?
그 작가의 색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만의 언어, 때로는 폭언이었으며, 때로는 절규의 숨결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저 난폭한 짓거리, 통제되지 않은 발작 같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가 캔버스를 내려칠 때마다 공기가 일그러졌고, 색은 물감이 아니라 실제가 되어 흘러내렸다.
붉은색은 단순한 붉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을 태웠고,
파란색은 시간의 속도를 늦췄다.
노란색은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어 숨길 수 없는 본능을 끌어올렸다.
그의 퍼포먼스에는 흥분과 광란이 겹으로 중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 때문이 아니었다. 보는 이들이 느낀 것은 ‘색에 의해 조정되는 감정’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인간이 색을 본다는 것은, 먼 너무나 먼 캄캄한 우주, 빅뱅의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것과 같은 카오스라는 것을....
더 투박하게,
더 무식하게,
더 깊이.
형태를 지우고, 의미를 부수고, 규칙을 짓밟았다.
고상한 드로잉 따위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그 세계의 본질은 정교함이 아니라 충돌 속에서 드러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몸 자체가 캔버스가 되었다.
살 위에 쏟아지는 색, 흘러내리는 물감, 뒤엉키는 감각.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이 몸으로 스스로를 그리고 있다는 것을.
한국에서 누드 모델을 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예술의 한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환경은 상당히 보수적인 편에 머물러 있다. 표현의 자유와 공공의 기준 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 그 경계는 유독 엄격하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창작의 의도와 맥락이 충분히 고려되기보다 결과물의 표면적인 요소만으로 판단되는 상황도 반복됐다. 온라인에 게시한 글이 삭제되거나, 어떤 플랫폼에서는 반성문을 요구받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현재 한국 예술 환경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대중적 합의나 충분한 논의 없이 작동하는 규제는 오히려 창작자에게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고, 더 과감한 표현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책임과 손해는 결국 개인에게 집중된다. 그 점에서 지금의 구조는 창작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수묵화와 페인팅 퍼포먼스의 콜라보는, 황산 3절이 지닌 담백하고 간결한 미감과 자연스럽게 호응한다. 오랜 중국 문화의 결이 단층처럼 응축된 황산의 풍경은, 특히 안휘성 휘주 지역의 미학과 맞닿아 있으며, 그곳은 중국 전통 예술의 본향이라 불릴 만큼 고결하고 빈티지한 미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이번 중국에서의 페인팅 퍼포먼스는 그 작가의 현란한 색채보다는 담채의 농을 따라, 청화백자의 은은한 기운을 수묵으로 옮기고자 고민했다. 처절한 고뇌, 그것은 화려한 색의 과잉이 아니라, 세월의 두께를 머금어 곰삭은 먹향이 지닌 깊은 호흡을 다시 불러내고자 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청화백자의 맑은 숨결 위에 인체가 스며든다. 유약이 얇게 흐른 백자의 표면처럼, 피부는 과장되지 않은 빛을 머금고 담담하게 존재한다. 파격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이 퍼포먼스는 격렬함보다 절제에 가까운 은은한 여백을 침잠하며 그려졌다.
붓(페인트)이 닿기 전의 정적, 숨소리와 체온만이 공간을 채운다.
인체는 더 이상 인권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다. 어깨의 완만한 곡선은 황산의 능선을 닮고,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미묘한 음영은 오래된 굉촌의 골목처럼 깊이를 품는다. 붓이 천천히 움직이며 남기는 청색의 선은 문양이 아니라 시간의 궤적이다. 그것은 전통 청화백자의 문양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지 않고, 오히려 비워진 공간과 균형의 담채다.
이 날의 퍼포먼스는 ‘그린다’기보다 인화지가 약품에 잠기듯이 갈아 앉는다’ 에 가깝다. 물감은 피부 위에 얹히지 않고 번지며, 수묵화의 먹처럼 농담을 만들어낸다. 번짐과 여백, 그 사이에서 인체는 점점 사라지고 무기물의 예술적 존재로 환원되었다.
유려한 곡선ㅡ 단아한 자태ㅡ 모노크롬한 미의식ㅡ 거대한 대지, 유구한 역사, 그 한 모퉁이에 남겨진 소소한 흔적, 화룡정점! 청화백자!
살아 있는 몸이지만, 동시에 땅속 깊은 갱, 1000년의 세월에 응축되어 화석이 되어버린 유물처럼 고요한 침잠 속에 잠겨있다. 이번 작업은 노출의 강도가 아니라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관능을 강조하기보다, 안정된 호흡과 균형 속에서 인간의 형태미를 태고적 자연의 예술로 되돌려 놓는 프레임이었다. 황산의 절경이 과장 없이도 깊이를 주듯, 미니멀하고 모노크롬한 절제된 색과 선만으로 중국보다 더 중국답게 소소하고 미묘하게 그려내고 싶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평선, 광활한 대지 위에 풍진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전차와 말들의 울음 그리고 병사들의 고함,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나르는 명적들이 내는 기묘한 소음, 피와 땀을 튀기며 달리는 영웅호걸들의 일그러진 표정과 거친 숨소리가 광풍을 휘몰아 공기를 가른다.
하얗고 파란 페인트가 허공을 향해 폭발하며 그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페이드아웃....
연막같이 짙은 안개가 모든 것을 가렸다가 천천히 증발하면 서서히 희미하게 형체를 더해 가는 몸! 점점 선명을 더 해가는 몸 위로 나타나는 이미지!
시간의 차원이 한 겹 벗겨지며 화면이 디졸브 되며 나타난 레이어는 극한의 고요함 속에 은은히 퍼져나가는 와룡선생의 비파의 감미로운 음률....그리고 겹쳐지는 비취 계곡의 은은한 계류 소리...
가슴을 배 위를 그리고 황산의 깊디깊은 협곡을 잠식하듯 천천히 흘러내리는 하얀 운해, 그리고 파란 하늘!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라도 들릴 듯 조용한 사위에 천둥처럼 울리는 소리 뚝! 그리고 또 뚝! 방울 바울 떨어지는 페인트 소리, 그리고 스스로 흐르며 그려내는 신묘한 형상!
자연이다. 산이다. 대지다. 그리고 마을이다.
다 타고 남은 잿 속에 남은 사리처럼 굳어진 묵상 청화백자!
결국 남는 것은 ‘몸’이 아니라 ‘기운’이다. 그리고 소멸이다. 천천히 흘러 스스로 새겨지는 청화백자의 푸른 향기, 시간의 간격을 머금은 수묵의 먹내, 그 위에 인체는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풍경이다. 신기루 같은 아스라한 영상을 남기고 증발해 버리는 황산의 운해처럼
몸이 움직일 때마다 근육과 관절의 용틀임, 꿈틀대며 승천하는 용이 되어 1/1000의 순간 순간들이 조각조각 쪼개지며 카메라 속에 응축되어 영원의 예술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