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강한 지시성이 있다.

입력 2026년06월23일 10시35분 배택수 조회수 104

지시성과 표현의 불균형

사진을 바라볼 때 우리는 보통 이것은 무엇인가.” 먼저 묻지 않는다.

사진 속에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알아보고,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알아본다. 건물과 거리, 바다와 하늘도 마찬가지다. 사진은 대상을 비교적 구체적이고 익숙한 모습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형상을 거의 즉시 인식한다.

이것이 사진이 가진 강한 지시성(indexicality)이다.

사진은 단순히 현실과 닮은 이미지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피사체에서 반사된 빛이 렌즈를 통과해 필름이나 디지털 센서에 흔적을 남긴다. 사진은 현실의 대상을 직접 접촉한 빛의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한때 그 대상이 실제로 카메라 앞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누군가의 얼굴이 사진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그 사람이 촬영의 순간 그곳에 있었다고 믿는다. 오래된 거리의 사진을 보면 그 거리와 건물들이 한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다고 받아들인다. 전쟁터나 재난 현장의 사진이 기록과 증거의 역할을 하는 것도 이러한 물리적 관계 때문이다.

사진은 끊임없이 말한다.

이것은 존재했다.”

이 사람은 여기에 있었다.”

이 장면은 한때 현실이었다.”

이 점에서 사진은 다른 시각예술보다 훨씬 강한 현실 지시력을 가진다. 화가는 보지 않은 장면을 그릴 수 있고, 상상 속의 인물과 공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사진은 우선 카메라 앞에 존재한 대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진은 기표 중심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화면의 표면에는 사람과 사물, 장소와 사건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사진은 무엇이 있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사진이 잘 보여준다고 해서 잘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사진 속 대상의 이름과 형태는 쉽게 알 수 있지만, 그 대상이 왜 촬영되었는지, 사진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 장면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길 위에 서 있는 사진을 본다고 하자.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기다리는 중인지, 떠나려는 중인지, 불안한지, 평온한지, 혹은 사진가가 그를 어떤 의미로 바라보았는지는 사진만으로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다.

사진은 외형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내면을 직접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사진에는 지시성과 표현 사이의 불균형이 생긴다.

지시성은 강하다.

표현의 의미는 열려 있다.

사진 속 피사체는 분명하지만 사진가의 의도와 감정, 생각은 모호하게 남는다. 다시 말해, 보이는 것인 기표는 구체적이지만 뜻해지는 것인 기의는 고정되지 않는다.

사진가는 어떤 순간을 선택하고, 특정한 거리와 높이에서 대상을 바라보며, 화면의 일부를 프레임 안에 넣는다. 이 모든 선택에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의도가 관람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은 없다.

관람자는 사진가가 남긴 시각적 단서를 통해 의미를 짐작해야 한다. 표정과 몸짓, 배경과 거리, 빛의 방향, 프레임의 구성 등을 살피면서 사진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스스로 해석한다.

사진은 정답을 건네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왜 이 사람을 찍었을까.

왜 이 순간을 선택했을까.

왜 이런 거리와 시선으로 바라보았을까.

이 장면은 단순한 기록인가, 아니면 어떤 사회적 의미를 품고 있는가.

사진의 표면은 현실을 향해 열려 있지만, 그 의미는 관람자의 사유를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사진은 기록과 해석 사이에 존재한다.

현실의 흔적이 사진을 믿게 만든다면, 의미의 불확정성은 사진을 생각하게 만든다. 사진이 오직 지시성만 가진다면 그것은 사물의 확인이나 기록에 머물 것이다. 반대로 현실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사진만이 가진 증거성과 긴장도 사라질 것이다.

사진의 힘은 이 두 성질이 함께 존재하는 데 있다.

사진은 현실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면서도, 그 현실을 하나의 의미로 닫지 않는다. 피사체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관람자에게 남겨진다.

바로 이 불균형 때문에 사진은 단순한 복제가 아니라 해석의 예술이 된다.

작품 해석

- Rineke Dijkstra

Rineke Dijkstra, 리네케 다익스트라해변의 초상연작, 19921998

리네케 다익스트라의 해변의 초상연작에는 해변을 배경으로 카메라 앞에 선 청소년들이 등장한다. 인물들은 대부분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은 단순하다. 특별한 소품이나 극적인 장면도 없다. 자연광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의 몸과 표정이 화면의 중심을 이룬다.

사진이 먼저 보여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

해변에 선 청소년, 수영복을 입은 몸, 카메라를 바라보는 시선, 약간 긴장한 자세가 사진의 기표를 이룬다. 관람자는 이 사람이 실제로 어느 순간 그 해변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 사진의 지시성은 강하다.

인물의 몸과 표정, 피부의 질감, 자세와 시선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은 한 사람의 존재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사진 속 청소년은 자신감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성장기의 어색함과 자기의식이 느껴지기도 하며, 사회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읽힐 수도 있다.

어떤 인물은 몸을 곧게 세우고 있지만 손과 발에서는 긴장이 느껴진다. 또 다른 인물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이면서도 자신의 몸을 어떻게 보여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듯하다.

다익스트라의 사진은 인물의 외형을 자세히 보여주지만, 그 내면을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성격인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다. 사진은 한 사람의 존재를 증명하지만 그 사람의 정체성을 완성해주지는 않는다.

이 지점에서 지시성과 표현의 불균형이 드러난다.

사진은 말한다.

이 사람이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는 말하지 못한다.

이 사람은 이러한 존재이다.”

인물의 실재는 분명하지만, 성장과 불안, 자기의식과 정체성이라는 의미는 관람자가 사진 속 단서를 통해 구성해야 한다.

해변은 보통 자유와 휴식의 공간으로 여겨지지만, 이 연작에서는 오히려 인물의 고립과 긴장을 드러내는 무대처럼 보인다. 넓은 공간 속에 홀로 선 인물은 자신의 몸과 존재를 의식하며 카메라 앞에 놓인다.

관람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기의 불안, 사회적 시선,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진은 한 사람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지만,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끝내 열어둔다.

이것이 해변의 초상연작이 가진 힘이다. 피사체의 존재는 강하게 지시되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하나로 결정되지 않는다.

- Jeff Wall


Jeff Wall, Mimic (1982)

제프 월의 Mimic에는 도시의 인도를 걷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한쪽에는 아시아계 남성이 있고, 다른 쪽에는 백인 남성과 여성이 함께 걷고 있다. 백인 남성은 눈가에 손을 대고, 아시아인을 조롱하는 이른바 눈 찢기동작을 취한다.

사진의 표면은 매우 구체적이다.

도시의 거리, 나란히 걷는 세 사람, 남성의 손동작과 표정, 서로의 거리와 방향이 분명하게 보인다. 관람자는 사진 속에서 인종을 조롱하는 행동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무엇이 보이는가는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단순하지 않다.

이 사진은 인종차별의 순간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읽힐 수 있다. 동시에 도시에서 서로 다른 인종과 계급이 마주칠 때 발생하는 긴장, 일상 속에 숨어 있는 폭력, 타인을 바라보는 편견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백인 남성의 행동은 노골적이지만, 다른 인물들의 반응은 분명하지 않다. 아시아계 남성이 그 동작을 보았는지, 여성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이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진은 사건의 한순간만을 보여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이 장면이 우연히 포착된 거리사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심하게 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제프 월은 배우와 장소를 선택하고,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장면을 다시 구성했다.

그럼에도 사진은 현실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사진의 지시성을 복잡하게 만든다. 사진 속 인물과 장소는 실제로 카메라 앞에 존재했지만, 장면 전체는 자연스럽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작가가 재구성한 상황이다.

사진은 실재를 기록하지만, 그 실재는 이미 연출된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실제 인종차별 사건의 기록인가. 아니면 인종차별의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시각적 비유인가. 혹은 관람자가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폭력의 순간을 다시 보게 만드는 장치인가.

사진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작품 속 행동은 명확하게 보이지만, 작가가 왜 이 장면을 선택했고 어떤 판단을 요구하는지는 관람자가 생각해야 한다.

Mimic은 지시성과 표현의 불균형을 더욱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현실의 형태는 정확하게 나타나지만, 그 현실은 연출된 것이다. 사진은 인종차별적 제스처를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그 장면의 의미를 설명하는 문장은 제공하지 않는다.

관람자는 사진을 보며 불편함을 느끼고, 그 불편함의 이유를 스스로 질문하게 된다.

이 행동은 개인의 무례함인가.

사회에 뿌리내린 인종적 편견의 표현인가.

도시의 일상 속에 감춰진 권력관계인가.

사진을 바라보는 나는 이 장면에서 어느 위치에 서 있는가.

제프 월은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장면을 설명하거나 해석을 강요하지 않는다.

무엇이 찍혔는지는 분명하지만, 왜 이 장면인가 하는 질문은 관람자에게 남겨진다.

리네케 다익스트라와 제프 월의 작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진의 지시성과 표현의 불균형을 보여준다.

다익스트라의 사진에서는 한 사람의 실재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 내면과 정체성은 열려 있다. 제프 월의 사진에서는 인종차별적 행동이 구체적으로 보이지만, 장면의 사회적 의미와 작가의 의도는 관람자의 해석을 요구한다.

한 작품은 인물의 침묵을 통해, 다른 작품은 사건의 긴장을 통해 의미의 빈자리를 만든다.

사진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 사이의 간격에서 관람자는 사진을 읽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진은 현실의 증거를 넘어 사유의 예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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