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리뷰: 청계천 2013
초원은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다
초원은 무한대로 넓고 황량하다. 지평선 끝까지 풀밭 외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초원의 역사는 단 한시도 멈춘 적이 없다.
사람은 이름을 바꾸며 살아도,
초원은 기억을 바꾸지 않는다.
그들의 그림자를 밟듯,
동쪽에서 또 다른 먼지가 피어올랐다.
피빛 먼지였다.
초원이 붉게 물들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질주하는 또 하나의 폭풍.
초원은 넓다.
너무 넓어서 내비게이션도 포기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애초에 길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 가세요?"
"가다 보면 나오겠지."
이것이 초원의 GPS다.
기원전 7세기.
초원 서쪽에서 또 이상한 인간들이 나타났다.
돌궐.
정령(丁零).
서부 시베리아 사내들.
왜 왔냐고?
모른다.
그들도 모른다.
유목민에게 목적지는 출발하고 나서 정하는 것이다.
집도 재산도 가족도 모조리 이동식인데 인생 계획이 있을 리 없다.
초원에서는 이사를 가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째로 지고 다닌다.
유목민은 원래 이유를 만들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니까.
그 후손 가운데 일부는 지금도 위구르라는 이름으로 몽골과 신장 일대에서 살아간다.
오늘도 누가 쳐들어왔다.
또 이름을 적는다.
흉노.
선비.
오환.
유연.
돌궐 시즌2.
모글리 리메이크판.
역사가 아니라 넷플릭스 시즌 업데이트였다.
그리고 드디어 등장했다.
초원의 슈퍼빌런. 흉노!!!!
선우 두만이 앞장섰다.
중국 기록은 참 솔직하다.
아니,
솔직하다 못해 거의 악플 수준이다.
"키는 작다."
"몸은 단단하다."
"머리는 크다."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콧구멍은 넓다."
"콧수염은 억세다."
"턱수염은 별로 없다."
"귀는 길고 귀고리를 했다."
"앞머리는 밀고 정수리에만 머리카락을 남겼다."
거기다 눈동자는 불타고,
눈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고 적었다.
사진도 없던 시대에 저 정도면 거의 주민등록증 발급 수준이다.
신기한 것은 훗날 유럽 사람들이 기록한 훈족의 왕 아틸라도 똑같은 얼굴이었다.
역사는 거짓말을 해도,
유전자는 좀처럼 거짓말을 안 한다.
기원전 3세기 말.
두만은 월지를 공격했다.
초원은 또 피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 무렵 중원에서는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나라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라를 부수고 있었다.
진시황은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수 많은 영웅들을 무릎 꿇리고, 거대한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다.
웬만한 장수들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런데... 그 황제가 무서워한 것이 있었다. 초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초원에서 달려오는 흙먼지였다.
멀리서 흙먼지가 피어오르면, 그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말일지,
흉노일지,
죽음일지.
만리장성은 벽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황제의 불안과 공포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거대한 심리상담 기록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점쟁이 하나가 불을 질렀다.
"호(胡)를 가진 자가 진나라를 망하게 할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황제는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문제는 '호'라는 글자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오랑캐도 호(胡)요,
북방 민족도 호(胡)요,
사람 이름에도 호가 들어가고,
지명에도 호가 들어간다.
심지어 아들 이름도 호다.
점쟁이들은 참 편하다. 호떡장수 맘대로다.
틀려도 맞고, 맞아도 맞는다.
그날 이후 진시황은 흙먼지만 날려도 심장이 먼저 도망쳤다.
혹시 저 먼지 속에서 흉노가 튀어나올까.
혹시 저 말발굽 소리가 내 제국을 짓밟으러 오는 것은 아닐까.
결국 그는 만리장성을 세웠다.
세상은 그걸 세계 최대의 건축물이라 부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서워 죽겠습니다."라는 비명이 돌로 굳어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참 웃긴 일이다.
세상을 통일한 황제도,
초원을 통일한 유목민도,
결국 서로를 가장 무서워했다.
인류 역사는 영웅들의 전기가 아니다.
겁 많은 인간들이 서로 먼저 겁주다가 만들어 낸 초대형 막장드라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