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후는 고조 유방의 황후였고 혜제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녀를 단순히 황후라 부르는 것은 너무 얕다. 그녀는 한 왕조를 세운 마지막 설계자였고, 동시에 인간 욕망의 해부학을 완성한 외과의사였다.
여후는 원래 유방의 고향인 패현에서 큰 상업으로 이름을 날리던 상인의 딸이었다.
장사는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지만, 진짜 장사는 사람을 사고파는 일이다. 그는 돈이 쌓이자 비단과 소금을 더 사들인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샀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투자처는 황금광산도 아니고 비단길도 아니다. 권력의 씨앗이다.
어쩌면 그는 진시황에게 투자했던 여불위의 환생이었는지도 모른다. 돈은 돌고, 권력은 남는다. 돈으로 권력을 사면 돈은 사라지지만, 권력은 다시 돈을 낳는다. 장사꾼은 그 계산을 누구보다 빨리 한다.
유방은 왕이 아니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거리를 떠돌던 건달이었다. 그러나 누드사진가가 옷을 벗겨 인간의 본모습을 보듯, 그는 유방의 허름한 옷 속에서 황제의 골격을 먼저 보았다. 세상은 비단옷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투자자는 아직 입지 않은 황룡포를 먼저 본다.
그는 아낌없이 돈을 대주었고, 마침내 가장 큰 투자까지 감행했다. 자신의 딸, 여후였다.
유방에게 여후는 사랑의 선택이라기보다 정치의 계약서에 가까웠다. 여자라고 모두 사랑해서 곁에 두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권력을 위해 침상에도 도장을 찍는다.
유방은 본래 여색을 즐기던 호색의 정점에서 노는 인간이다. 영웅은 호색한이라는 말은 아마도 그에게서부터 시작되었나 보다. 아름답고 애교 많은 척부인 같은 여인들과 웃고 떠드는 시간이 훨씬 즐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조폭에게도 의리가 있고, 영웅에게도 빚은 있다. 그는 상인의 은혜를 외면할 수 없었고, 결국 여후를 정실로 맞아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났다고 사랑까지 태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육체는 한순간 만나도 마음은 끝내 서로를 벗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누드를 찍으며 깨달았다. 사람은 옷을 벗는다고 모두 벌거벗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비단옷을 벗으면 비로소 인간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알몸이 되어도 끝내 권력이라는 갑옷을 벗지 못한다.
여후가 바로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유방의 사랑을 얻지 못했지만, 사랑보다 오래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일찍 배웠다. 침상은 식어도 권력은 식지 않는다. 젊음은 시들어도 욕망은 늙지 않는다. 남자의 품은 비워질 수 있지만, 황후의 자리는 결코 비워둘 수 없다.
어쩌면 여후는 처음부터 남편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남편이 입게 될 황제의 옷을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부전여전인지 이미 유방의 출세를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건 사실이 아니다 진실은 그녀가 킹메이커로서 생 건달 유방을 황제로 만들었다는 것이 맞는 답일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유방과의 첫날 밤 이미 훗날 모든 것을 벗겨도 끝내 벗지 못할 단 하나의 옷, 권력이라는 누드 위의 마지막 의상을 벗지 않고 유방을 맞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누드를 찍는다. 내가 원한 것은 여후의 진실된 알몸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김가중의 누드철학)의 서두부터 그것은 실패로 귀결되고 마는데...
사람들은 누드라 하면 먼저 옷이 벗겨진 육체를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벗기고 싶은 것은 살갗이 아니다. 권력이고, 욕망이고, 허영이며, 인간이 평생 숨기려 애쓰는 가식이다.
여후를 바라보면 더욱 그렇다.
유방은 영웅은 호색한임을 증명하듯 수많은 여인을 사랑했지만 여후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랑받지 못한 여인은 때로 가장 무서운 권력을 사랑한다. 그녀는 침실에서 패배했지만 궁궐에서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누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비단옷을 벗기면 황후도 한 사람의 여자일 뿐이다. 왕의 곤룡포를 벗기면 황제 역시 두려움에 떠는 한 인간일 뿐이다.
나는 오래전 파리에서 어느 판사의 부인을 누드로 촬영해 왔다.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 불로뉴 숲의 낮거리 숏타임 창녀도 아니고 판사 부인이라고?"
나는 웃었다. 우매한 인간들의 상상력은 불로뉴 숲 입구에서 검문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내 편이 되었다. 프랑스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의 부인 카를라 브루니가 모델 시절 촬영한 포르노 사진들(우리네 사고와 기준 그리고 시야로 보면 포르노 그 이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기준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대통령의 영부인도 누드모델이 될 수 있는데, 판사의 부인이 누드모델이 되는 것이 무엇이 그토록 놀라운 일인가.
결국 벗은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편견이었다.
동양은 누드를 먼저 음란으로 재단하고, 서양은 예술부터 이야기한다. 물론 둘 다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누드는 외설도 아니고 성역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가장 먼저 만나는 방식일 뿐이다. 얘기가 또 삼천포로 흘렀다. 다시 여후를 홀라당 벗기러 돌아가 보자.
여후는 달랐다.
그녀는 비단옷을 벗겨도 권력이 남았고, 권력을 벗겨도 욕망이 남았다. 끝내 아무것도 벗겨지지 않는 여자였다.
나는 늘 말한다.
누드사진은 몸을 벗기는 작업이 아니다. 인간이 평생 감추려 했던 욕망의 마지막 관념을 벗기는 작업이다.
여후는 내게 가장 어려운 모델이다.
그녀는 비단옷을 모두 벗어도 끝내 권력만은 벗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체는 한 인간의 것이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이미 권력이라는 두 번째 피부를 입고 있었다. 그 피부는 비단보다 질기고, 갑옷보다 단단했다.
그녀는 수많은 영웅을 죽였다.
한신도, 팽월도 칼보다 먼저 정치의 거미줄에 걸렸다. 그녀는 피를 흘리는 전쟁보다 피를 흘리지 않는 함정을 더 잘 만들었다. 칼은 육체를 죽이지만 계략은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는 사실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은 승패를 가르지만 권력은 기억을 지배한다. 여후는 적의 목을 베는 것보다 적의 이름을 지우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충성을 반역으로 바꾸고, 공신을 역적으로 만들었으며, 황제가 내린 공훈마저 한 장의 조서로 뒤집어 버렸다. 죽음은 한순간이지만 의심은 평생을 죽인다. 그녀는 바로 그 의심을 가장 날카로운 칼로 만들어 유방을 로봇처럼 조종했다.
그래서 유방의 궁궐에서는 칼 부딪히는 소리보다 침묵이 더 무서웠다. 대신들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눈치를 살폈고, 장수들은 적보다 황궁의 시선을 더 두려워했다. 권력이란 칼을 휘두르는 힘이 아니라, 칼을 뽑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그녀는 몸소 증명했다.
나는 그녀의 누드를 촬영(그녀의 속성을 벗기려)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살갗은 카메라 앞에 드러났으나 권력은 끝내 노출되지 않았다. 권력은 피부에 입는 옷이 아니라 영혼에 새겨지는 문신이었기 때문이다. 여후의 진짜 누드는 알몸이 아니라, 천하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했던 그 욕망의 벌거벗음이었다.
사진은 말이다.
셔터 한 번으로 생명을 남길 수도 있고 지워버릴 수도 있다. 프레임 밖으로 밀려난 존재는 역사에서도 사라진다. 여후는 정치라는 카메라를 들고 한나라의 역사를 다시 촬영한 최초의 편집자였다.
사람들은 누드를 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짜 누드는 욕망이다.
벌거벗은 육체보다 더 적나라한 것은 권력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눈빛이다. 아무리 화려한 황후의 예복도 그 탐욕을 가리지 못한다. 아무리 찬란한 황제의 용포도 음흉스러운 야망을 숨기지 못한다.
결국 역사란 거대한 누드 사진 한 장이다.
시간은 모든 인간의 옷을 벗긴다. 황제도, 장군도, 황후도 마지막에는 이름 하나만 남는다. 그 이름 곁에 사랑이 남느냐, 공포가 남느냐, 그것이 역사가 찍는 마지막 사진이다. 여후는 천하으 권력을 누렸지만 사랑을 얻지 못했고, 왕조를 지켰지만 자신의 인간성은 끝내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진실된 알몸을 끝내 드러내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나는 오늘도 그녀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
육체를 벗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끝내 벗지 못하는 욕망이라는 마지막 껍질을 보기 위해.
*** 작가의 자존을 높입니다.
한국사진방송은 개인뉴스홈 아이템 성공 수직성장. 현재 1만2000 예술가 일10만, 동접 2000, 대한민국 대표 art platform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