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신기루, 혹은 생태계의 희생양
몽골 고원의 서남쪽, 아득한 모래 언덕 너머에는 전설이라 불린 한 사나이가 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알라 웃딘’이라 칭송했다. 몰락한 호레즘 왕국의 고귀한 혈통인지, 그저 이름만 같은 옆집 아저씨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로 역사의 붓 끝도 귀찮아지면 사실의 틈새를 적당히 낭만으로 메우는 법이니까.
그는 사막 한가운데 거대한 황금 궁전을 건축했다. 마호멧의 열렬한 신자였던 웃딘은 마호멧이 그의 백성들에게 나직이 약속했던 바로 그 낙원과 똑같이 설계했다.
예언자는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낙원에 이르면 필멸자는 여인을 제한 없이 품에 안을 것이요, 발밑에는 우유와 꿀, 그리고 영혼을 울리는 포도주의 강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리라."
공자, 부처, 예수와 함께 지구라는 작은 별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4대 성인 중 한 명의 호언장담이었으니, 소시민의 입장에서 그의 말을 감히 의심할 여지는 없다. 성인의 입에서 나온 천국 보증서라면 최소한 유효기간이 영원일 테니까.
그의 정원에는 미켈란젤로도 감히 조각하지 못할 아름다운 형태의 꽃들이 연중 피어났고, 천상의 신비로운 과실들이 열매를 맺었다. 사슴은 은빛 궤적을 그리며 뛰놀았고, 토끼는 깡충거리며, 영양은 자신의 뿔을 르네상스의 조각품처럼 자랑했다. 심지어 물개와 사향노루까지 정원에 등장했다. 도대체 어떤 미치광이 마법사가 사막 한가운데에 어떻게 물개를 풀어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말기로 하자. 원래 초현실주의 블랙코미디의 무대 위에서 생태계란 늘 희생되는 법이니까.
궁전의 도랑마다 흘러가는 액체도 유별났다.
한 도랑에는 갓 짜낸 우유가 흰 비단처럼 흘렀고,
다른 도랑에는 황금빛 꿀이 끈적하게 조각을 이루었으며,
또 다른 도랑에는 시인의 영혼을 적시는 향기로운 포도주가 흘렀다.
그리고 마지막 도랑에는 불로장생을 약속한다는 약수가 만돌린 소리를 내며 흘렀다. 만약 그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필시 청량한 탄산음료가 흘렀으리라. 인간은 천 년의 세월이 흘러 시대의 양식이 바뀌어도, 순수한 물보다는 영혼을 마비시키는 달콤함에 매료되는 존재이므로.
천국이라는 이름의 황금새장
사람들은 넋을 잃고 감탄했다.
"아아, 이곳이야말로 신이 약속한 낙원이로다!"
그러자 비단 옷을 입은 세금 징수 관리가 차가운 현실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닙니다. 유지비입니다."
그 순간, 몽환적인 천국은 무자비한 현실의 영토로 추락했다.
웃딘에게는 금화도, 권력도,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홀리는 치명적인 매혹의 주문도 풍부했다. 만약 그에게 그런 상재(商才)와 주술적 재능이 없었다면, 이런 궁전은커녕 훗날 수도 한복판의 아파트 청약조차 당첨되지 못하고 길거리를 헤맸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신상처럼 준수한 얼굴과 굳건한 체격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원래 전설 속 영웅은 언제나 미형(美形)이어야 하는 법이다. 못생긴 영웅이 기록에 남는다면, 후대의 화가와 조각가들은 붓을 꺾고 모조리 실업자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권력이라는 인테리어와 황금 새장
그리고 이 대서사시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있었으니, 바로 여인들이었다.
권력이란 참으로 이상한 연금술이어서, 사람 그 자체보다 사람의 미학을 끌어모으는 이상한 자력을 지닌다. 웃딘의 황금새장 역시 수많은 여인들로 가득했다. 역사는 이를 두고 '위대한 사랑'이라 기록하지만, 뼈 있는 풍자극은 이를 '권력자가 배치해 둔 인간 인테리어'라 읽는다.
밤마다 플루트와 하프의 음률이 궁전의 벽을 타고 흘렀고, 현대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배꼽춤의 현란한 아름다운 춤사위가 이어졌다. 사실 밸리댄스라고 불리는 이 춤은 영웅들을 유혹하여 그 정자가 자신의 몸 안에 강림하기를 원한 춤으로 시작되었기에 지금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교태 그 자체였다. 그녀들의 낭랑한 웃음소리는 담장을 넘어 무심한 초원의 밤하늘로 번져나갔다.
멀리서 바라본 그곳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낙원이었으나,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곳은 서로의 영혼을 갉아먹으며 살아남아야 하는 치열한 직장이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비단옷은 영혼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았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는 삶의 행복을 증명하지 못했다. 명장(名匠)이 세공한 황금 새장이라 한들, 결국 그것은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다른 형식의 감옥에 불과한 법이다.
역사의 타임머신과 18홀의 평화
웃딘은 온갖 기이한 취미를 가졌다고 전해진다. 누군가는 거친 야생의 사냥이라 하고, 누군가는 질풍 같은 승마라 하며, 또 누군가는 하늘을 가르는 매사냥이라 했다.
하지만 기발한 후대의 전기작가들이 이 거룩한 역사 속에 자꾸만 ‘골프’와 ‘카레이싱’, ‘패러글라이딩’과 ‘요트’라는 현대판 유희를 끼워 넣는 바람에, 시공간의 캔버스가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인의 직관으로 가만히 상상해 보라.
만약 그 붉은 사막과 초원의 시대에 진정 '골프'라는 유희가 존재했더라면, 칭기즈칸은 굳이 세계를 정복하려 유라시아 대륙을 피로 물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유럽 대원정은 전면 취소한다."
"어찌 그러십니까, 위대한 칸이시여?"
"오전 10시에 18홀 예약이 잡혔다."
그랬다면 인류의 아픈 역사는 붉은 피를 흘리는 대신, 푸른 잔디 위에서 아까운 그린피를 흘렸을지 모를 일이다.
성실한 허영의 재방송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천 년 전의 까마득한 과거에도 자신의 욕망을 미학으로 포장하며 살았고, 천 년이 지난 먼 미래에도 그 욕망을 화려하게 래핑하며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웅장한 궁전은 현대의 5성급 호텔로 변했고, 황금 잔은 보헤미아의 샴페인 잔으로 바뀌었으며, 칼을 쥔 권력은 세련된 명함 한 장으로 모습을 바꾸었을 뿐이다. 역사는 결코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인간이 가진 허영이라는 이름의 예술은 놀라울 만큼 성실하게 같은 장면을 끝없이 재방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