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놀음’4 각혈, 저승사자를 만나다, 김가중 건강秘書
‘폐병쟁이’
영화나 소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병이었다. 가난하여 걸리는 병으로 주로 영양결핍이 된 몸을 공략하는 치사한 병이다.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먹지,
우리나라가 어둡고 가난하던 시절 이병은 저승사자와 가장 친한 병으로 예술가들의 가장 만만한 오브제로 등장을 하였다. 전염성이 아주 강해 이병에 걸리면 일단은 왕따가 됨으로 병을 숨기다가 더욱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10대 후반 병약하고 영양결핍이었던 내가 이병의 제물이 된 것은 필연이었다. 세계제일의 가난한 나라,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보다도 더 가난한 나라였다. 젊은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면 1~2년 사이에 요즈음 유행하는 좀비와 모양새가 아주 흡사하게 변해간다. 부스스한 머리칼, 퀭한 눈망울, ET같이 앙상한 팔다리, 기운이 없어 어기적거리는 걸음, 쿨룩 쿨룩 기침을 하다가 칵 쏟아내는 핏덩이....
UN에서 나에게 콩, 옥수수, 분유, 마른 감자칩을 보름마다 한가마니(?)씩 보내왔다. 잘 먹어야 병을 이길 수 있기에 영양보충을 위해서였다.
유한양행에서 만든 약인데 유파스짓인가? 아마도... 약 이름이야 어쨌든 하루에 70알을 삼켜야 되는데 한알 크기가 아몬드만하다. 한 끼에 25알인데 한사발정도 된다. 거칠고 비릿하고 아주 역겁다. 토끼똥과 질감이 흡사한데 차라리 토끼똥이 먹기에 훨 낳을 것이다. 물만 삼키고 약은 입안을 맴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안간힘을 다해 약을 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고통스러운 2~3년쯤이 지나자 새로운 약이 나왔다. 팥알만한 하얀 약을 하루 한 개만 먹으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결핵으로 저승사자를 만나는 일이 없어졌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과학의 개가였다.
군대 갈 때쯤엔 나의 투병기는 먼 전설이 되어 있었다.
161cm, 50kg의 숏다리 폐병쟁이였던 내가 입대를 한 것도 웃기는데 더구나 최전방 DMZ 151지피에서 헌병 화이바를 쓰고 민정경찰과 태극기를 떡 붙이고 복무했다. 입대하자마자 생긴 일은 범강장달 같은 넘들의 장단지에 매미처럼 붙어 뛰어다니다 결국 생병이 나서 6개월이 넘는 병원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체력이 달려 43kg까지 무게가 내려가 있었다. 그, 통에 남들은 4~6개월이면 일병으로 진급하는데 10개월이 넘도록 이등병 신세였다. 그래도 훗날 병장으로 제대하였다. 당시의 내 동기들은 다 상병 제대였다.
사연은 어떤 멍청한 높은 인간이 병장학교를 만들어 입대하자마자 이 학교를 졸업하면 짬밥 3개월만에 병장을 달고 자대에 배치되어 부분대장으로 복무를 하였다. 준사관제도도 있어 하사관 학교를 나오면 하사로 분대장으로 부임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런데 이 제도는 사병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켜 군 기강을 무너지게 만들었다. 일등병도 5개월 넘는 짬빱을 경험했는데 3개월짜리가 자신보다 두 계급이나 더 높고 더구나 부분대장이란 간부라니....
특히 열 받는 것은 물병장이라고 불리던 이 낙하산 병장들 때문에 사병의 장군이라는 병장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상병상태로 전역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주민증에 군역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엔 군역과 군번이 기록되어 주민증을 볼 때 마다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이 불만들은 부대마다 폭력으로 번져 일병이나 상병에게 부분대장인 병장이 매일 두들겨 맞는 기막힌 사단으로 번졌다.
그런데 부대 최대의 약골로 일병을 11개월 만에 단 낙오자가 어떻게 병장을 달고 전역을 했을까? 훗날 사단본부 대기소에 전역 신고차 모인 동기들 수백명이 죄다 상병제대라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일부는 눈물을 흘리며 최전방에서의 고생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야 너는 나같이 고생 안해 봤지? 빠따가 없는 날은 잠을 못 잤어, 줄빠따가 몸에 배서 빠따없인 불안해서 잠이 안 오더라. 그 대가가 겨우 상병이라니,” 어느 동기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늘어놓던 하소연이다.
일병진급이 많이 늦어진 나는 제대말년이 다되어서 상병으로 진급했으니 병장진급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병제대는 정말 싫었다.
어느 날 최전방 철책으로 순찰 나온 상급부대 서무병을 으슥한 벙커로 유인했다. 녀석은 나보다 모가지 하나는 더 얹어놓은 거구였고 사회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던 장사였다. 벙커에 들어서는 녀석에게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사실 안마정도였을 것이다. 50kg의 체구에서 나오는 펀치가 무슨 위력이?
하지만 나의 발악에 놀란 녀석이 “왜 이러십니까? 말로 하십시다.” 아무 말도 없이 무차별 가격을 계속했다. 발길질도 무차별로 가했다. 드디어 기진맥진하였고 손등도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녀석은 기가막힌지 멀쩡하게 서서 고스란히 맞고 있었다.
“헉헉, 병장 헉헉, 병장티오 몇 개 내려왔어?”
“두개요” 빌어먹을 전부대에 1년에 겨우 두 개라니....
“가봐!” 녀석과 나눈 대화는 이게 다였다.
두 달 후 전달된 나의전역통지서는 상병이 아닌 병장으로 표기되어있었다.
그토록 병약하던 나의 몸은 병장제대 후 놀라울 만큼 건강해져 있었다. 제대 후 곧바로 사진을 시작했고 덕분에 무척 가난한 삶을 살아야 되었다. 숙명이라 여기고 가난을 즐기며 살았다.
마흔 줄이 넘어선 어느 날 목구멍에 어떤 느낌이 왔다. 불길한 느낌이었다. 10대 후 반에 늘 느끼던 그 느낌, 과연 시커먼 선혈을 한줌씩 울컬울컥 토해냈다. 이 각혈은 시도 때도 없이 신호를 보내 버스나 지하철에선 급히 내려 으슥한 곳을 찾아가야 되는데 그 동안 참기가 정말 어려운 놈이었다.
결핵은 크게 두려운 병은 아니다. 잘 먹고 약만 잘 먹으면 얼마든지 완치가 가능한 병이다. 하지만 재발된 결핵은 항성이 강해 현대의학으로도 쉽게 고치기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아하 드디어 재발이 되었구나. 으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검은 갓, 검은 도포, 핏빛 잃은 하얀 피부의 깡마른 저승사자가 밤마다 문을 열려고 덜컹덜컹 흔들다 돌아갔다. 겁이 나서 병원엘 갈수가 없다. 틀림없이 폐병의 재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고려대 병원을 찾아갔다. 지금 나의 작업실이 있는 혜화동 아남아파트 자리는 오래전에 우석대 병원을 거쳐 고려대 병원자리였다. 다행히 기관지염이었다. 병원에서 준 약은 매우 쓰고 독해 이 약을 먹으면 일이 불가능했다.
약복용을 포기하고 공기 맑은 북한산 기슭 정릉 산속에서 한동안 칩거하며 형제봉을 오르내렸더니 별 탈 없이 나았다.
나는 이때부터 산의 영험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왜? 였는지는 기억에 없고 산을 오르고 싶었다. 갑자기
청수장에서 보국문 길을 따라 중턱쯤 가니 약수터가 있다. 약수 한잔을 하였는데 속이 매스껍고 하늘이 노랗게 바뀌더니 구토가 시작되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기도 어려웠다. ‘내가 이 산 하나를 못 오르다니...’ 앉아 쉬면서 오기가 바싹 타 올랐다. 숨을 고르고 다시 오르기 시작하여 보국문을 너머 대성문을 거쳐 문수봉까지 내쳐 걸었다. 이때 정말 신기한 것은 하늘이 노랗도록(하늘이 노래지는 것은 절대 사실이다.) 체력이 달렸는데 쉬었다 다시 걸으니 문수봉 까지 걷는데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날부터 산귀신처럼 산을 싸 돌아다녔는데 전혀 힘든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산행을 오랫동안 멈추다 다시 시작하면 역시 비슷한 탈진 상태가 또다시 오는데 그것을 한번만 이기고 나면 두 번 다시 같은 증세는 오지 않고 깃털같이 가볍게 산행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경우 몸이 날아갈 듯 상태가 좋으면 산행을 멈추고 그러다 어떤 병이 도지면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는 못된 버릇을 가졌다. 그런데 그 병이 어떤 병이든 산행을 하면 반드시 깨끗하게 나았으니 산의 영험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산행이 무병장수의 첩경이란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 동감하시는 분들이 무척 많을 것이다. 필자의 오래전 사진친구 중 대기업 부장출신이 있는데 이분의 일과가 술과 여흥이었다. 당연히 성인병 10과가 최대수치로 위험군 까지 갔다. 그런데 친구중에 산악인이 있어 그가 산엘 가면 낳는다는 것을 알고 데리고 가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산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대곤 했다. 당연하다. 이 분의 몸으론 단 100m도 오르기 힘들었을 것이다. 숨차고 무릎 아프고...... 그러다 사진 찍느라 암벽 타는 여류산악인을 알게 되었는데 사진욕심에 산을 오르게 되었다.
필자가 아주 중요하게 앞서 말했드시 달랑 한 번의 산행만으로도 산은 반드시 보답한다는 것이다. 이분 한 번의 산행으로 무언가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반 년 만에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되었다.
결과는 그는 이제 사진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산행 전도사를 하고 있다. 누구든 그를 만나면 산으로 끌려가야 가야 된다. 그토록 치를 떨고 싫어하던 산은 이제 그의 신이 되어 있다.
* 신선이 반드시 산에 사는 이유다.
* 1년전 쯤 촬영한 동영상이다.(2017년1월)
지난 1년간 다소 게을러져서 산행이 뜸했는데 요즈음 몸 상태가 1년전 보다 못하다. 2018년 벽두부터 마음을 다잡아 산을 넘나들기를 다짐하고 있다. 1년전 보다 아주아주 더 좋은 몸 상태로 만들어 놓고야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