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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생의 은밀한 꿈
dl화은 시인 네 번째 시집 <미간> 펴내
이화은 시인이 네 번째 시집 <미간>을 펴냈다.
이화은 시인은 경북 진량 출생으로 1991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그동안 <이 시대의 이별법>, <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걸다>, <절정을 복사하다> 등을 펴냈다. <포엠토피아> 주간을 역임했고 <시와 시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눈썹과 눈썹 사이가 멀어 시인이 된 여자
눈썹과 눈썹 사이를 평생 걸어가는 여자
눈썹에서 눈썹까지
한 번도 당도하지 않은 여자
잃어버린 황금눈썹 한 포기를 찾아
끝없이 방황하는 여자
상상의 구름 떼가 그녀의 눈썹을 뜯어먹는다
힌 이마에 푸른 번개가 뜨고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예언자처럼
가장 뜨거운 시의 심장을 훔쳐 도망쳐 온
눈썹과 눈썹 사이 광활한 미간眉間
시 <미간> 전문
첫 시집의 자서에서 “단 한명의 독자도 나에겐 너무 많다”며 더할 수 없는 겸양을 보였던 이화은 시인은 실제로는 누구보다 소통이 잘 되는 시를 써왔다. 그녀의 시에는 누구나 공감할 만한 삶과 자연에 대한 성찰이 친숙한 언어들로 표출되어 있다.
이혜원 평론가는 “이화은의 시는 외계에 대한 주체의 정서적 반응이 중심을 이루는 서정시의 근본적인 특질에 부합한다. 가족, 자연, 일상 등 시인이 접촉하는 모든 대상은 주관의 필터를 통해 변형되고 서정의 색체를 입으면서 ‘시작’ 상태가 된다. 어떤 대상과 경험이든 강력한 주관에 의해 통합되어 일관성을 띤다. 그녀의 시가 속도감 있게 읽히며 활달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라고 평한다.
이혜원 평론가는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이 시에 대해 “미간의 넓이와 문인의 기질을 연관시키는 속설에서 촉발된 상상은 ‘눈썹과 눈썹 사이를 평생 걸어가는 여자’로 이어진다. 미간의 넓이가 상상력과 비례한다면 시인으로서 자신이 가야 할 길도 거기에 놓여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눈썹과 눈썹 사이 광활한 미간’에 시의 길이 있다면 시인으로서 그녀는 아직 ‘한 번도 당도하지않은’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한다.
저 가벼운 터치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단순한 반복을
시라고 말해도 되나
저 현란한 수사를
시라고 말해도 되나
허공을 즈려밟는 위험한 스텝을
꽃에 얽힌 지루한 염문을
한 번쯤
하루쯤
한 生쯤은 몸을 바꾸고 싶은
저 미친 외출을 시라고, 시인이라고 말해도 되나
시<나비> 전문
시인이 보는 세상은 참으로 감각적이고 시적이다. 허긴 이세상의 만물이 시적인 것이 아닌 것이 있겠는가.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빗줄기, 한 겨울 마른 나뭇가지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 눈송이, 공원에서 모이를 쪼고있는 비둘기 한 마리, 계절 따라 떠나가는 철새무리들의 질서정연한 군무 등. 이들 중 가장 시적인 것은 역시 시인이 포착한 대로 ‘나비’의 행태일지도 모른다.
‘가벼운 터치’, ‘허공을 즈려밟는 위험한 스텝’, ‘꽃에 얽힌 지루한 염문’ 등에서 독자들은 보일 듯 말 듯 이어지는 시의 리듬과 감각적인 언어들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꼭 시가 아니라도, 시인이 아니라도 누구든 ‘한번쯤/하루쯤/한 生쯤은 몸을 바꾸고 싶은/저 미친 외출을’ 꿈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쪼그리고 앉아
쉬하는 자세가 가장 좋다
멀리서 보면 제 것을 들여다보는 듯,
허나 정말로 들여다볼 필요는 없다 쑥이 다 올려다보고 있다
고로 바지보다는 통치마를 입어라 입어보면 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아니 눈 먼 소녀경이던가?
적당히 자란 연애를 자르듯 칼질은 정확해야 한다
싱싱한 추억으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오금이 저리거든, 오금 저렸던 기억들을 한 칼 한 칼 마음에 저며라
인생 공부에 칼 같은 도움이 된다
쑥 캔 자리는 돌아보지 마라
칼잡이가 뒤를 돌아보면 이미 프로가 아니다
허리가 몹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후유증은 없다
시<쑥 캐기> 전문
이화은 시인은 그녀의 세 번째 시집 <절정을 복사하다>에서 “이 숨 막히는 정적/한순간만은/다시 복사해/내 가장 숨 막히는 시간 속에/걸어두고 싶다”고 쓴 적이 있다. 그녀는 “심장박동이 갑자기 멈추거나 뇌혈관이 철없이 만개해버릴 위험이 다른 사람보다 16배가 높은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한다. 하루에 한 알씩 아스피린 상용을 의사는 권하지만 나는 약을 먹지 않는다. 새삼 아무것도 예방하고 싶지는 않다. 이 위험이 내 生의 언저리를 더 달구어줄 수 있다면! 바라면서 뜨거운 하루하루를 꿀꺽 삼킬 뿐이다”라고 말한다. 역시 칼잡이다운, 프로다운 말이다.
김수이 평론가(경희대 교수)는 이화은 시인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채굴하는 사랑이 ‘수요가 없어’도, 즉 현실적인 쓰임새가 없어도 개의치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인 쓰임새와 무관하므로, 이화은이 채굴하는 ‘사랑의 지하자원’은 과거나 현재의 시간의 차이에도 구애받지 않는다. 지나온 삶의 시간은 그녀의 기억과 욕망의 협주에 의해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고 말한다.
비 온 이튿날
고추밭의 잡초 한 떨기를
무심코 뽑아 올렸는데
손 끝에 물컹 딸려 오는 지구 한 덩이
깜짝 놀라 탁!
놓아버리기는 했지만
불알을 잡혀 동그랗게 나뒹굴던
한 남자를 생각했으니
내가 지구의 금소를 건드린 것이다
큰 일 날 뻔한 것이다
오늘 아침
지구가 몇 바퀴 나뒹구는 동안
잠깐 어지러웠던 이유를
두 개의 말랑한 해가 나란히 떠올라도
지구인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시<급소를 건드리다> 전문
오탁번 시인(고려대 명예교수)은 그의 저서 <헛똑똑이의 시읽기>에서 이화은 시인의 시에 대해 “그가 지니고 있는 시에 대한 다부지고 앙큼한 고백을 대하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시의 이야기가 담고 있는 내용이나 주제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안에서 마냥 휘젓고 다니는 언어의 마력 때문이었다. ‘그놈’이라고 불리는 詩는 메기나 뱀장어처럼 진흙 속을 파고드는 동물적인 심상인 듯하다가는 이내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번지는 가 싶더니 다시 呪術과도 같은 시적공간을 창조해 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필자 역시 이화은 시인의 시를 볼 때 마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시적 상상력과 종횡무진으로 구사하는 시어에 감탄을 금치못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아무 떨림도 없이
삶은 오리알을 홀딱 벗기며
꽃의 엉덩이같은
희고 둥근 알몸에 이빨을 박으며
내가 돌 던졌던 죄 하나를
잠깐 이해했을 뿐이다
시<약발> 전문
이화은 시인은 시집 <미간> 앞글에서 “연민을 앓고 있다. 흘러가는 것들이 가여워 살이 아프다. 이 시집 속으로 사라진 9년이라는 시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모든 2절’처럼 ‘겨우 목청 푼 슬픔’은 잊거나 무시해버리고 ‘시리게 늑골로 스며드는’ 2절을 맘껏 음미하고 즐기시기를 빈다.(정리/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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