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눈꽃산행
설경(雪景)의 황홀함에 취하다
기상청 발표에 의하면, 대관령에 영하 14도의 혹한과 함께 밤 사이 25cm 정도의 폭설이 내렸다 한다. 대관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추위가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이미 한달전 쯤 계획된 산행이지만 걱정도 된다. 대관령은 해발 832m.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인 함백산 만항재(1,330m)에 비하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대관령 자체가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다. 수년 전 능경봉을 오를 때 이곳에 폭설이 내려 시야 몇 미터도 보이지않을 정도였던 기억이 난다. 대관령까지 제설작업은 제대로 돼 있을까? 영하 14도라면 도로는 얼지않았을까? 허지만 걱정보다 모험과 도전감이 오히려 마음을 설레게 한다. 어려운 코스가 아니니 일단 가보자. 전인미답의 눈쌓인 산길을 걷는다면 이 또한 멋진 트레킹이 아니겠는가?
내 걱정은 기우였다. 서울에서 3시간 쯤 걸려 도착한 대관령 고개는 이른 제설작업으로 눈이 거의 치워져 있다. 어느새 도로의 그 많은 눈을 치웠을까? 우리나라도 대단한 나라라는 느낌부터 먼저 든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탄성을 지른다. 사면이 눈꽃세상, 설국(雪國)이다. 고갯마루의 우람한 풍력발전기들이 필자 일행을 반긴다.
대관령은 예로부터 고개가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는 뜻의 ‘대굴령’에서 음을 빌려 대관령이 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또 다른 유래로는 영동지방으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아이젠과 스패츠를 찬 후 10시 쯤 산행을 시작했다. 대관령휴게소에서 선자령 들머리까지 300m, 양떼목장도 250m 거리이다. 200m 정도 가면 선자령 등산 안내도와 바우길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삼거리에 이른다. 좌로 가면 산 허릿길, 직진하면 능선을 따라 가는 코스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순환코스이다. 우리 일행은 먼저 능선길을 탄 후 하산시 허리숲길을 따라 내려올 예정이다. 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향해 걷는 총연장 약 350km로 강릉바우길 14개 구간,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울트라바우길, 계곡바우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자령 등산코스는 대관령바우길 2개 구간 중 하나이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킨다.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바우’라고 부르듯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산천답게 자연적이며 인간친화적인 트레킹 코스이다.
바우길삼거리에서 선자령 정상까지는 5.8km, 능선길 5km를 포함, 오늘 왕복 10.8km 정도를 걸어야 한다. 아치터널을 지나면 국사성황당 표지석을 만나고 등산안내판도 보인다. 이정표를 따라 좌측 등산로에 접어든다.
이번 산행은 필자가 창립 때부터 10년 이상 인연을 이어왔던 4050서울산악회 원정산행의 일환이다. 우리 일행의 리더는 여자산우, 이 분 역시 창립 때부터 산행을 이끌어온 베테랑 대장이다. 대장은 차내에서 만약 등산로 적설량이 많을 경우 남자산우들이 러셀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걱정했으나 이 역시 기우였다. 러셀(Russell)이란 등산 전문용어로, 선두에 서서 눈을 쳐내어 길을 다지면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다행히도 다른 등산객들이 먼저 눈길을 다져놓아 고생하지않고 가볍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었다.
들머리에서 20여 분 가면 전에 군부대에서 사용했던 벙커를 만나고 곧 이어 KT중계소에 이른다. 선자령 등산로는 완만하여 이름 그대로 트레킹코스이지만 초입길은 특히 평지 수준이다. 굳이 등산을 부담스러워하는 일반인들도 가볍게 선자령 설경을 즐겨도 될 정도이다. KT중계소에서 15분 정도 가면 다시 삼거리, 직진하면 무선표지소, 선자령은 좌측 방향이다. 선자령까지는 3.2km 남았다.
숲터널로 들어선다. 나무가지가 온통 눈꽃이다. 땅도 하늘도 눈세상, 가벼운 바람에도 가지에 걸려 있는 눈덩이가 우수수 떨어진다. 필자가 전에 능경봉을 오르면서 썼던 ‘설화(雪花)’라는 졸시가 떠오른다.
은빛 바다
잔잔한 산호림珊瑚林 사이로
가느다란 빛 헤집고 들어오면
숲, 돌연 잠에서 깬다
얽힌 가지, 가지마다
하얗게 핀 꽃, 꽃들
잔물결 한가닥에
호들갑떨며 몸을 비벼댄다
파르르 떠는 침묵
꽃잎 우수수 떨어진다
함께 한 산우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아이가 된다. 추위도 아랑곳하지않고 깊게 쌓인 눈 속에 벌렁 누워보기도 하고 동료들 끼리 눈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눈처럼 맑고 하얀 마음으로 즐거워한다. 설경에서의 인증샷을 남기고 싶어하는 산우들의 재촉에 카메라 셔터가 쉴 틈이 없다. 오늘 산행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순간이다.
KT송신소에서 30분 쯤 더 가면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서면 강릉시와 동해바다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대관령 정상에서 강릉시내까지는 고작 15km 밖에 안된다. 하얀 솜털을 뒤집어 쓴 산능선도 한 폭의 수묵화처럼 아름답다. 가슴이 활짝 열리는 것 같다. 여기까지만 와도 선자령 설경의 진수를 상당부분 만끽한 기분이다. 이곳 전망대는 대관령휴게소와 선자령 정상의 중간 지점. 선자령 정상까지는 2.5km 정도 남았다.
전망대에서 한 참을 쉰 후 선자령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다시 눈덮힌 숲길로 들어선다. 등산로 좌우에는 야생화를 소개하는 팻말도 계속 이어진다. 붓꽃, 할미꽃, 미역취, 꿩의 다리, 얼레지, 기린초, 꽃창포 등. 선자령에는 약 2천가지의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다고 한다. 점봉산 곰배령, 금대봉, 함백산 만항재 등과 함께 이곳 역시 야생화 천국이라 부를 만 하다.
얼마 쯤 더 갔을까? 산악자전거를 탄 젊은이가 따라온다. 아무리 완만한 등산코스라 하지만 눈 쌓인 등산로를 자전거로 오르다니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필자의 걸음걸이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오른다. 대부분은 타고 오르지만 비탈이 심한 곳은 내려서 끌고 가기도 한다.
정상이 점점 가까워 온다. 정상까지 800m 이정표가 보인다. 고원지대에는 풍력발전기 여러대가 전신주처럼 능선에 줄 서 있다. 선자령 능선은 바람이 특히 심해 ‘바람의 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에는 무려 50여 기의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있다고 한다.
정상이 가까워지면서 바람도 더욱 강해진다. 고원비탈이 눈보라로 하얀 꽃먼지를 일으킨다. 바람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정상능선은 광활한 고원이다. 앞에 가는 산우들의 행렬이 마치 아프리카 사막을 가로지르는 순례자 행렬같다. 1,000m가 넘는 고산 평원에 바람이 세다보니 큰 나무는 없고 키 작은 관목류 들만 바람막이로 능선을 지킨다.
바람은 눈보라를 일으키면서 동해바다 쪽을 향해 고개를 넘는다.
12시 무렵 드디어 선자령 정상에 도착. 설경을 즐기면서 천천히 오르다보니 들머리로부터 약 2시간이나 걸렸다. 정상에는 ‘백두대간 선자령’이라고 쓰여진 거대한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상 높이는 해발 1,157m. 대관령 휴게소가 해발 832m이니 불과 300여 미터를 올라온 셈이다.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선자령(仙子嶺)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야트막이 솟은 봉우리로, 남쪽으로는 발왕산, 서쪽으로는 계방산, 서북쪽으로는 오대산, 북쪽으로는 황병산 등이 장쾌하게 이어진다. 예전에는 대관산(大關山) 혹은 보현산(普賢山)이라 불렸고, 보현사에서 보면 마치 떠오르는 달과 같다고 하여 만월산(滿月山)이라고도 불렸다.
정상 바로 아래 바람이 없는 숲길로 내려가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를 한 후 12시 40분 경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길은 순환등산로로 허리숲길 5.8km 정도. 허리숲길이다 보니 바람은 거의 없고 잔잔하다. 아기자기한 숲길을 산책하듯 걷는다. 정상에서 800m정도 내려가면 하늘목장 갈림길을 만나고, 중간 쯤에 샘터도 만난다.
숲이 제법 깊고 아늑하다. 대관령∙선자령 지역은 800-1,100m 이상 고산강풍지대여서 나무가 자라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곳은 70년대 초까지 황폐지로 방치돼 왔으나 1976년부터 약 10여 년에 걸쳐 방풍책을 설치하는 등 특수한 조림방법으로 전나무, 낙엽송, 잣나무 등을 심어 현재와 같은 숲으로 조성되게 됐다고 한다.
선자령 정상에서 40여분 내려오면 재궁골 갈림길. 우리 일행은 재궁골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중간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 한참동안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갈림길에서 좌측 비탈길로 30여 분 더 가면 다시 전망대에 이른다. 전망대에 올라서니 발 아래 양떼목장 전경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양떼목장은 대관령 휴게소에서 불과 25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날머리가 멀지않으니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양떼목장 철책을 따라 내려간다. 철조망 틈 사이로 눈 쌓인 양떼목장 전경도 담아본다. 양떼목장 설경은 언제봐도 아름답고 목가적이다. 하산길 끝무렵에는 ‘제비동자꽃’ 자생지도 만난다. 이 꽃은 강원도 일부 지역에 제한적으로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드디어 날머리인 대관령 휴게소 도착, 점심시간 포함 약 5시간 정도 걸렸다. 날씨도 상당히 풀렸다. 아침 출발 당시에는 꽁꽁얼어 잘 보이지않던 등산안내판도 눈이 녹아 이젠 잘 보인다. 용평스키장 입구에 위치한 황태회관에서 황태찜 등으로 하루 산행을 마감한다. 식당 벽에 걸려 있는 설경사진들이 다시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남은 겨울, 다음 눈꽃산행은 어디로 갈까? 겨울은 겨울대로 계속 나를 싱그럽게 유혹한다. (글,사진/임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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