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술이 과연 몽골의 전통주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나라에서는 보드카가 술이 아니라 기후다.
러시아 사람들도 보드카를 목숨처럼 사랑한다.
소련이 무너진 직후, 보드카가 너무 그리웠던 러시아 탱크병들이 탱크 한 대와 보드카 한 상자를 맞바꾸었다는 실화는 희대의 막장드라마였다. 국가안보보다 알코올 도수가 더 높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몽골에 와 보니 러시아 병사들은 아직 핏뎅이 애주가 축에도 못 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술이라면 무덤 속의 시체도 벌떡 일어난다는 속담이 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그게 매뉴얼이라는 걸 알았다.
문제의 술판은 울란바토르가 내려다보이는 신성한 산자락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은 한밤중.
바람은 사람의 영혼까지 냉동시키는 삭풍.
분위기는 제사인지 전쟁인지 분간이 안 된다.
나는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구실을 찾았다.
"운전중인데 웬 술?"
그러자 다시카가 거대한 몸집 한가운데서 우레 같은 목소리를 꺼냈다.
"여긴 우리가 법이야."
끝.
민주주의 법치는 산 아래에 두고 올라온 모양이었다.
현지 스태프들은 한국말도 어찌나 잘하는지, 도망갈 핑계조차 통역이 필요 없었다.
이곳의 음주법은 단순하다.
권하면 거절하지 말 것.
받으면 내려놓지 말 것.
입을 대면 끝까지 비울 것.
그 순간 나는 술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니라 칭기스칸 원정군 입대식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잔 하나가 돌 때마다 적의 백만 군대가 잡초처럼 스러진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둠 속에는 수많은 게르가 줄지어 서 있고, 말들이 바람을 가르며 울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누군가 활을 들고
"유럽으로 출정!"
이라고 외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한가운데에는 활 대신 보드카 병을 들고 있는 한국 누드사진작가 한 명.
생각해 보면 그 장면 자체가 이미 현대미술이었다.
나중에 어느 방송국 피디 머시기는 내가 몽골에서 포르노를 촬영하여 한국인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둥, 한국인이 조폭문화를 수출했다는 둥 무려 한 시간 동안 떠들어댔다.
참 이상한 일이다.
그 방송국 PD가 그날 그 술판을 직접 봤다면 아마 프로그램 제목부터 바뀌었을 것이다.
'누드사진작가의 일탈'이 아니라,
'보드카를 마시지 않으려다 부족회의에서 사형당할 뻔한 어느 한국누드작가의 생환기.'
이날 밤 나는 이스라엘에 폭격맞은 레바논의 도시 같았다.
술 한 잔 거절하려다 국제분쟁으로 번질 뻔했으니까.
별 빌어먹을 법도 다 있다. 다른 부족들을 습격하기 전에 전의를 다지는 기분이다. 몽롱한 눈아래 보이는 것은 어둠 속에 수많은 천막들과 말들이 도열해 있는 전장 같은 으스스한 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