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벗는다는 것은 살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다.
권력을 벗기고, 허세를 벗기고, 역사가 덧칠해 놓은 화장을 지우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찍는다. 아니, 역사의 누드를 촬영한다.
어느 날 흉노의 절대군주 묵돌 선우가 한나라의 태후 여후에게 기상천외한 연애편지를 보냈다.
"독수공방하는 나는 가축처럼 살고 있소. 때때로 국경까지 나가 당신을 그리워하곤 하오. 계약에는 해마다 황녀를 보내기로 되어 있는데, 당신은 황제의 여인으로 아름답고 지혜롭다 들었소. 이제 과부가 되었으니 무슨 재미로 사시오? 나 또한 홀몸이니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보면 어떻겠소."
이 편지는 사랑의 고백이 아니었다.
초원의 황제가 중원의 황후에게 던진 정치적 누드였다.
칼은 칼집에 들어 있었지만 문장은 이미 말을 타고 장안을 짓밟고 있었다.
여후는 거품을 물고 자지러졌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 흉노를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전쟁보다는 간계에 능한 그녀였기에 부하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지 않았다.
신하들은 유방이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던 치욕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여후는 칼 대신 웃음을 선택했다.
"선우께서 친히 편지를 보내주시니 황공하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이도 빠지고 허리도 굽은 늙은 몸이 되었나이다. 대신 수레와 말을 보내드리오니, 밤낮으로 저를 대신하여 시도 때도 없이 올라타시옵소서."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욕설이었다.
욕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품격으로 하는 것임을 여후는 알고 있었다.
칼을 뽑지 않고도 상대의 허리를 먼저 접어버리는 정치.
그것이 황후의 언어였다.
그러나 나는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한다.
만약 묵돌이 칭기즈 칸처럼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내였다면 어땠을까.
백등산에서 유방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나라는 역사의 교과서에서 한두 장도 넘기지 못한 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초원은 천 년 먼저 유라시아를 하나로 묶었을 것이고, 세계사는 몽골 제국을 칭기즈가 아니라 묵돌의 이름으로 외웠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저 멀리 한반도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한사군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낙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의 사랑도 국가와 국경의 희생양이 되지 않아 우리가 눈물로 외우는 비련의 사랑은, 어쩌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평범한 연애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늘 거대한 전쟁으로 움직인다고 믿지만, 나는 가끔 편지 한 장이 제국 하나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갑옷만 보지만, 나는 갑옷을 벗은 권력을 본다.
황후의 치맛자락도, 선우의 늑대 가죽도 벗겨 놓고 보면 결국 두 사람은 외로움과 욕망, 계산과 두려움을 품은 인간일 뿐이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누드 철학이다.
누드는 몸을 드러내는 예술이 아니라, 권력의 마지막 옷 한 벌까지 벗겨 인간의 민낯을 바라보는 예술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예술은 벗겨진 인간의 기록이다.
나는 오늘도 역사의 황제와 황후의 옷을 벗기고 있다.
살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끝내 감추려 했던 인간만의 속성을 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