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설원, 렌즈 그리고 피 흘리는 역사 따위
타타르한테 패하고, 테무친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당하면서 왕국은 풍비박산이 났다. 그리고 영하 40도의 아득한 몽골 대설원 위에서, 나와 칭스가 만났다.(사실 생명의 원천인 念이 그만의 능력으로 호출하고 조바가 순한 양을 만들어) 당시의 우리는 하루하루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었다. 칭스가 보르지긴족의 후예든, 아비 없는 하늘의 자식이든 내 알 바가 아니었다.
- 칭스가 정복한 것은 세계가 아니라 찰나였다
후일 칭스는 부족을 통일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세웠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칭기즈칸이라 부르며 역사책에 피로 써 내려갔다. 하지만 나는 안다. 칭스가 진정으로 눈뜬 것은 칼싸움이 아니라, 그날 설원 위에서 벗어던져진 모피 속 생명의 숭고함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거짓말을 하고 진실은 왜곡되며 문법은 파괴된다. 하지만 셔터가 찰칵하고 닫히는 그 100분의 1초 동안, 하늘의 아들도, 땅가진 타브가치도, 세계 제국도 모두 발가벗은 한 점의 '알'로 돌아가는 법이다.
念이 호출한 칭스는 역사속에서는 세계에 유래없이 가장 강력한 정복자였지만 김가중의 예술안에서는 동년배의 막역한 절친일 뿐이다. 물론 말코 역시 동격이었다.
칭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대형 카메라 삼각대를 고정하고 있었고, 나는 렌즈 셔터를 만지작거리며 소리쳤다.
"야, 칭스! 반사판 각도 좀 똑바로 잡아봐! 빛이 흩어지잖아!"
"카카야, 타타르 놈들이 추격해올지도 모르는데 지금 가죽 껍데기를 벗기고 누드를 찍을 때야?"
"이 무식한 놈아! 제국을 세우고 피를 흘리는 건 고작 몇 십 년짜리 역사지만, 이 장엄한 대자연과 원초적인 인체의 나신(裸身)이 만나는 순간은 영원이야! 너 역사 쓸래, 예술 할래?“
마침내 몽골의 아리따운(으이그, 또 '알'이네!) 여인들이 두터운 동물 가죽과 퀴퀴한 모피 껍질을 활활 벗어던졌다. 하얀 설원 위에 드러난 생명 그 자체의 원초적 곡선! 태양 빛이 눈밭에 반사되어 여인의 피부를 어루만질 때, 나와 칭스는 넋을 잃었다. 말코는 진작에 으슥한 눈구덩이로 사라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도 딸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보라, 독자들이여! 카메라 렌즈 앞에 펼쳐진 그 아스라한 대자연의 장엄함과 그 속에서 빛나는 생명의 알몸을 보면서, 과연 무슨 제국주의니, 족보니, 정통 역사니 하는 따위의 잡념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올 구멍이 단 한 평이라도 남아 있겠는가?
- 푸른 늑대의 혈통과 금빛 물결의 결계
대륙을 붉게 물들인 정복자, 칸(Khan)의 법전 ‘예케 자사크’에는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금기가 적혀 있었다.
"어미의 신분이 어떠하든, 아비의 피를 물려받은 자는 모두 정당한 후계이다. 아비가 숨을 거두면, 선왕의 여인들은 장자의 소유가 되거나 새로운 운명을 부여받는다."
사람들은 이 참혹하고도 강인한 유목의 율법이 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이미 1,200년 전, 대륙 동쪽의 신비로운 정령 대륙 ‘부여(夫餘)’의 금와왕이 용의 신 해모수의 여인 ‘유화’를 거두었을 때부터 내려온 ‘혈통 보존의 주술’이었다.
용의 이름을 가진 아이, '주몽'
유화가 알에서 깨어난 신성의 아이를 낳았을 때, 하늘의 정령들은 아이에게 ‘몽(夢/勇)’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것은 동방의 언어로 ‘신궁(神弓)’을 뜻함과 동시에, 유목 부족의 언어로 ‘절대 꺾이지 않는 용맹’을 의미하는 마법의 정령어였다. 몽골의 원조가 될 푸른 늑대 부족은 먼 훗날, 자신들의 기원이 된 그 아이의 칭호를 가슴에 품고 대륙을 누비게 된다.
대설원의 밤은 시리도록 푸르렀다. 달빛조차 얼어붙은 듯 숨죽인 공제선 너머, 우뚝 선 사나이의 실루엣이 대지를 압도했다. 내 친구 칭스,
그의 눈빛은 대초원의 끝을 향하지 않았다. 먼 우주, 그 아득한 심연을 향해 레이저 빛처럼 뻗어나간 그의 시선은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푸른 늑대의 피가 요동치고 있었다. 대륙을 붉게 물들였던 그 용맹함, 꺾이지 않는 투지가 우주의 별들과 공명하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가고 있었다.
대설원의 밤은 깊어만 갔지만, 칸의 눈빛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대지를 밝히고 있었다. 그 불꽃은 나의 누드 위에 인류의 역사에 길이 남은 웅장한 서사, 푸른 늑대의 묵시록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었다.